빈 도시락이 두개나 들어 있는 책가방을 들고 학원에서 밤늦게 돌아온 큰아이가 느닷없이 친구에게 돈이 좀 필요한 모양인데 빌려줬으면 좋겠다고 했다.처음에는 친구 사이의 돈거래는 좋지 않다고 하면서 우리 형편에 그런 돈이 있느냐고 면박만 주고 말았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렇게 넘길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사정인즉, 그 친구의 아버지는 몇년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여동생 세식구가 같이 살고 있는데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게 된 여동생의 등록금이 모자라 30만원만 빌렸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다음달에 취직하면 월급타서 갚겠다는 말과 함께. 더이상 들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도와 가장 역할까지 하는 것이 대견했다.
하지만 요즘 30만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고 우선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자고 했다. 우리집 네 식구가 오직 하나 매달려 있는 아버지의 월급이 얼마이고 나가는 돈이 얼마이며 가을에 입주할 아파트융자금 이자가 턱없이 올랐다는 처지도 설명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은 남편이 어젯밤 등록금 얘기를 하던데 무슨 소리냐고 먼저 물어왔다. 아들 친구의 사정을 듣고 있던 남편은 어떻게 해보자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력을 보며 이것저것을 따지더니 지갑을 몽땅 털어놓고 출근 하는 것이었다. 마침 전세방을 낮춰가기로 하고 받아둔 계약금 중 10만원을 떼고 둘째 아이에게도 형 친구의 사정을 얘기해 주고 세뱃돈과 입대할 때 쓰려고 모아 두었던 통장을 털기로 했다. 이렇게 온가족의 협조로 그럭저럭 30만원을 채울 수 있었다.
일찍 학원에 간 큰아이가 송금할 계좌번호를 적어놓고 왔는데 어떻게 됐느냐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 잘 됐다. 곧 부쳐주마”하고 전화를 끊고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넘었다. 빨리 돈을 찾을 수 있게 해주자는 생각에 서둘러 은행을 찾았다. 받을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서 문득 어떤 여학생일까 궁금했다. 얼굴은 모르지만 괜히 정감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날듯이 가벼웠다. 따뜻한 봄바람이 옷깃에 스며들었다.
이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