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규(朴浚圭)전국회의장과 김영삼(金泳三·YS)전대통령은 사석에서 말을 놓는 사이다.
자유당 시절인 57년 4대 민의원선거에서 함께 낙선한 YS와 조병옥(趙炳玉)박사의 비서출신인 박전의장은 조박사 밑에서 민주당 구파(舊派)멤버로 일하면서 처음 만났다. 당시 YS는 청년부장, 박전의장은 문화부장이었다. 박전의장(정치학과)이 서울대 문리대 3년 선배이지만 YS(철학과)의 정계입문이 빨랐던 이유로 둘은 친구로 지냈다.
두 사람은 반(反)자유당투쟁과 당내투쟁을 함께하면서 처음부터 의기투합, 거의 매일 술자리를 함께하며 어울려 다녔다.
4·19혁명 직후에는 청조회(靑潮會)를 결성, 정풍운동을 함께 주도했고 5·16쿠데타이후 박전의장이 공화당으로 가는 바람에 정치행로가 갈렸으나 둘은 변함없이 자주 어울렸다.
79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김종필(金鍾泌)씨가‘체육관선거’에 대통령후보로 나서려하자 박전의장은 이를 주도적으로 반대했다.
‘3김(金)이 직선으로 페어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사실은 YS에게 기회를 줘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박전의장은 술회했다. 집안끼리도 가까워 박전의장의 가족들이 YS를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재산공개파문으로 두 사람은 영원히 남남이 됐다.
YS는 퇴임에 앞서 발표한 성명에서 “그동안 국정수행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본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표현으로 ‘문민사정(司正)의 피해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사과했다. 그 대상에 박전의장도 포함됐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