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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28)]괘씸죄 걸리면 『옷벗어라』

입력 | 1998-03-18 08:00:00


김영삼(金泳三·YS)정부가 출범하고 보름도 안된 93년 3월9일 검찰총장에 취임한 박종철(朴鍾喆)총장은 ‘행운아’였다.

문민정부 첫 법무장관에 임명된 박희태(朴熺太)장관이 인사검증파동으로 열흘 만에 물러나지 않았다면 그는 검찰총수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박장관과 김두희(金斗喜)검찰총장의 문민 수뇌부가 6공 기간 내내 ‘TK(대구경북)검찰의 황태자’로 입신양명해온 박총장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장관이 자녀의 이중국적 문제로 3월7일 사표를 제출하자 김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김두희검찰총장을 신임 법무장관에 임명하고, 그 다음날 ‘어쩔 수 없이’ 박종철대검차장을 총장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박총장의 ‘행운’은 얼마가지 않았다.

역시 ‘6공 황태자’였던 박철언(朴哲彦)씨가 슬롯머신사건으로 구속된 직후인 93년 8월 초순경.

사정(司正)작업에 깊숙이 관여하던 검찰간부와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만났다. 현철씨의 측근도 배석한 자리였다.

김현철〓고생하셨습니다. 문민정부 사정개혁을 위해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검찰간부〓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입니다.

김현철〓박종철총장은 어떻습니까.

검찰간부〓(잠시 머뭇거리다) 이번에 수사하면서 인간적으로 애를 먹었습니다. 검찰수뇌부가 그런 식으로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김현철〓(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수사지휘 책임을 물어야 되겠군요.

깜짝 놀란 검찰간부가 “검찰총장은 임기가 있는데 어떻게 경질한단 말입니까”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김씨는 “이것은 통치행위”라며 말을 잘랐다.

박총장은 한 달 뒤인 9월13일 전격 사퇴했다. 그는 “그동안 검찰이 벌여온 사정활동과 자기쇄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변을 남겼다.

▼ 『너무 심한것 아니냐』불평 ▼

김기섭(金己燮)전안기부운영차장은 다른 각도에서 박총장 경질 배경을 설명했다.

“정권이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려면 검찰총장 안기부장 국세청장 경찰청장이 잘해야 한다.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박총장은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도저히 함께 일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총장을 경질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경질된 것이다.”

박총장을 사퇴시킨 배경이 무엇이든 문민정부는 검찰총장의 2년 임기제를 훼손하는 오류를 범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한 임기제였으나 박총장은 겨우 6개월만에 물러난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문민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정부하에서도 임기제로 상징되는 ‘기관의 독립성’은 언제나 ‘통치행위’의 하위개념에 불과했다.

이른바 ‘괘씸죄’도 통치행위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 일쑤였다.

윤형섭(尹亨燮)전서울신문사장이 대표적인 경우.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임기말인 92년 8월 취임한 윤사장은 김영삼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93년 3월20일 새 이사진 선출을 위한 주주총회가 소집됐지만 총회 직전까지 자신의 교체사실을 몰랐다.

이사들은 모두 사표를 제출하라는 게 집권층의 뜻이지만 사장은 유임이라는 통보를 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윤전사장의 증언. “나는 사실 교육부장관 때 폐종양 수술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처음엔 암인 줄 알았어요. 상태가 극도로 심각했습니다. 처음 서울신문 사장을 맡았을 때는 대선만 치르고 수술을 받아야지 하고 미뤘습니다. 대선이 끝나니 당시 전무로 있던 사람이 ‘이사들은 모두 사표를 내지만 사장님은 그대로 갑니다’라고 해서 그러면 주총을 마치고 수술을 받아야지 했습니다. 그런데 주총 직전 바로 그 전무가 ‘사장님도 사표를 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라는 겁니다.”

정부는 주총 이틀 전인 3월18일 이한수(李罕洙)감사를 신임 서울신문사장으로 내정 발표했다.

주총을 마친 윤전사장이 집으로 돌아오자 이원종(李源宗)공보처차관의 전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차관은 윤전사장의 경복중 후배.

이차관은 대뜸 “선배님 정말 놀랐습니다. 주총까지 잘 치러내시고 끝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셨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치하’했다.

윤전사장은 “고맙지만 서울신문 사장은 상법상 임기가 정해져 있는데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차관은 “선배님은 서울신문을 ‘중립신문’으로 만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중립정부’가 물러났으니 ‘중립사장’도 물러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받았다.

중립정부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한 노태우대통령이 출범시킨 현승종(玄勝鍾)중립내각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차관의 ‘중립사장 퇴진론’은 대선 때 윤전사장의 비협조를 겨냥한 말이었다. 다시 윤전사장의 기억.

“대선 때 김영삼후보 진영은 나에게 ‘양다리를 걸친다’고 비난했고, 김대중(金大中)후보 진영은 내게 ‘김영삼후보를 편든다’고 불평했습니다. 김영삼후보 진영에서는 ‘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鄭周永)후보를 같은 크기의 제목으로 쓰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는 김대중후보측의 선거광고를 게재했다고 전화로 항의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윤전사장은 YS와 ‘해묵은 악연’이 있었다.

윤전사장이 교육부장관으로 취임한 직후인 91년 1월 초.

민자당 속초―고성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던 고 최정식(崔正植)의원이 장관실로 불쑥 찾아왔다.

그는 “정원식(鄭元植)전장관이 결재를 안해주고 (총리로) 가버렸는데 윤장관이 빨리 결재를 하라”는 것이었다.

13대 국회 때 통일민주당으로 당선된 최의원은 윤장관의 경복고 동기. 결재란 건국대가 당시 최의원의 지역구에 짓겠다며 교육부에 올린 동제대학 설립인가건이었다.

최의원은 동제대 설립인가건은 민자당 김영삼대표의 재가와 당정협의를 거쳐 “이미 얘기가 다 돼있다”며 압박했다. 그러나 최의원은 “친구니까 충고하는데 다시는 그런 식으로 장관실을 찾아오지 말라”는 윤장관의 ‘면박’만 받고 돌아갔다.

사건은 얼마 뒤 국회에서 터졌다.

국회 본회의에 출석했던 윤장관에게 메모가 전달됐다.

‘윤장관님 본회의가 끝난 뒤 김영삼대표실을 들러주십시오. 김종호(金宗鎬)원내총무.’

대표실로 가보니 김대표가 가운데 앉아있고, 김총무와 최의원이 좌우에 앉아 있었다.

김대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동제대학건은 공약입니다.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윤장관은 순간 긴장했다.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누구 공약이란 말입니까』 ▼

다음 순간 터져나온 윤장관의 대답은 거의 ‘폭탄선언’이었다.

“공약이라니 누구의 공약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장관으로서 (노태우)대통령의 교육관련 공약사항은 철저히 챙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공약에는 그런 공약이 없었습니다. 혹시 여기 있는 최정식의원의 지역구 공약을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김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강원도까지 찾아가 직접 공약한 사항입니다.”

실제로 김대표는 최의원의 지역구를 직접 찾아가 최의원의 손까지 잡고 동제대학 설립을 공약했다는 것이다.

윤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표님, 동제대학은 절대 안됩니다. 건국대가 충청도에도 대학을 또 하나 설립했는데 역시 부실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잘못 처리하면 대선을 앞두고 표만 달아납니다.”

김대표가 벌떡 일어서더니 “세분이서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 버리더라는 것이 윤전장관의 술회다.

윤전장관과 YS의 악연은 1년 뒤 후기대 입시문제 도난사건이 발생, 대학입시가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뒤 윤장관이 전격 경질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교육부장관을 물러난 직후 노대통령이 윤전장관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사실 윤장관을 경질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교육부장관은 시험지를 잃어버린 피해자인데 도난사건을 예방하지 못한 내무장관이 책임을 지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에서 하도 경질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김영삼대표측이 계속 윤전장관의 경질을 몰아붙였다는 얘기다.

박종철검찰총장 윤형섭서울신문사장만이 아니었다.

윤사장이 경질되기 일주일 전인 93년 3월13일 정부는 당시 조순(趙淳)한국은행 총재를 전격 퇴진시켰다.

한은 노조는 즉각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가 개혁인가’라는 성명을 냈다.

노조는 “중앙은행 총재가 임기를 3년이나 남겨두고 경질되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반발했다.

조총재가 대선 당시 ‘한은 3천억원 발권설(한은이 여당 선거를 돕기 위해 3천억원을 찍어 시중에 풀었다는 설)’을 주장한 국민당 정주영후보를 고소했다가 민자당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고소를 취하, 집권세력의 미움을 샀다는 게 노조의 시각이었다.

정권이 바뀐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김창혁·이수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