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유럽의 늙은 현자 밀란 쿤데라(69)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94년 ‘느림’ 이래 첫 작품 ‘정체성’(민음사).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 손아귀 안에 꼭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연인의 정체를 정말로 당신은 알고 있는가?
어쩌면 그의 질문은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책먼지 쌓인 연구실에서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자아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골몰한 것이 20여년. 금세기 최고 ‘꿈의 공장’ 할리우드도이미 ‘페이스오프(Face Off)’라는 액션영화에서 ‘내가 누구지?’라는 질문을 섬뜩한 웃음에 담아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언어의 연금술사 쿤데라의 솜씨는 그 모든 ‘느림’을 뛰어넘는다. ‘자아정체성’이라는 메마른 단어를 그는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의 안타까운 한숨 입맞춤 간절한 눈빛에 담아 육화(肉化)했다. 사회학자 안토니 기든스가 갈파했던 대로 ‘현대성은 우리 경험의 가장 개인적인 측면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니까.
광고회사의 커리어우먼 샹탈은 이혼 후 네살 연하의 프리랜서 장 마르크와 동거중.
어느날 남자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느끼자 자신이 ‘급속도로 시들어 가느다랗고 시커먼 줄기만 남았다가 우주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장미’가 될 것이라며 늙어간다는 사실에 초조해한다.
장 마르크는 애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라고 익명의 남성을 가장해 러브레터를 보내고 샹탈은 편지 덕분에 ‘무엇엔가에 얼굴을 붉히는’ 과거의 수줍음을 되찾는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 끌기 어려운 법. 편지 주인공이 다름아닌 장 마르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샹탈은 그가 자신을 버리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라고 오해해 런던으로 떠나고 장 마르크는 그녀를 뒤쫓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간과 자신을 매개하는 유일한 존재다. 서로가 없다면 ‘무관심이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동시에 ‘발걸음 하나하나가 통제되고 녹화되는 이 세계, 심지어 섹스를 한 뒤에도 다음날 연구소 직원이나 앙케트 조사원으로부터 “콘돔은 쓰나요? 그냥 하나요?”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는 세상’을 견뎌낼 수가 없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서도 언제 소멸할지 모르는 육체에 갇혀 있는 두 영혼은 불안하고 외롭다. 자신의 늙어가는 몸을 못 견뎌하는 샹탈만큼이나 장 마르크도 ‘어느날 샹탈이 보여주었던 확실성이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녀 역시 모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변하는’것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불안이 낳은 오해 때문에 결별로 치닫던 두 사람. 그러나 쿤데라는 마지막 장에서 이 모든 것이 한편의 악몽이었다며 극적 반전을 펼친다.
자신의 이름조차 잊어버린 채 미로에 갇힌 악몽을 꾸던 샹탈이 ‘사랑하는 남자가 여기 있다면 내 이름을 불러줄텐데, 그의 얼굴을 기억해내야 하는데…’라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장 마르크가 “샹탈! 샹탈!”을 부르며 그녀를 깨우는 것. 다시 편안한 잠을 청하며 샹탈은 속삭인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예요. 쉴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금세기초 쿤데라의 고향 선배 카프카는 ‘어느날 아침 깨어나보니 나는 한마리의 벌레로 변해 있었다’(소설 ‘변신’)고 현대인의 존재불안감을 예언했다. 쿤데라는 ‘정체성’에서 이제 만연한 그 난치병의 처방약을 제시한 것일까.
“내것이 될 수 없는 세계, 나의 정체성도 찾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가지 해결책이 있다. 사랑을 선택하느냐, 수도원을 선택하느냐. 샹탈은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창조의 신보다도 위대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중세 초기에 사랑은 이단이었다. 나는 이러한 이단이 우리 시대에는 어떻게 경험될 수 있는지를 그려내고 싶었다.”(‘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중)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