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취임후 한달은 새로운 집권기반의 구축을 위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50년만의 정권교체인 만큼 그에 따른 진통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소여(小與)의 한계가 예상보다 심각했다. 김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당선자시절과는 크게 달라진 정치환경에 직면했다. 여야의 밀월관계는 취임과 동시에 파경을 맞았다.
‘김종필(金鍾泌·JP)총리’임명동의안 파문은 ‘김대중정부’의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는 첫 사건이었다.
대선패배후 침체돼 있던 거야(巨野)가 총리임명동의안 파문으로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정국은 급속도로 경색됐다. 이는 조각과 후속인사의 지연뿐만 아니라 개혁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개혁의 속도가 느려지고 강도가 완화되는 듯한 조짐이 곳곳에서 표출됐다. 특히 개혁의 핵심인 재벌구조조정은 또다시 유야무야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까지 제기됐다. 그리고 이처럼 이완된 틈을 타고 구여권의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이 표출됐다.
‘북풍(北風)문건’파문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대철(鄭大哲)국민회의부총재의 문건내용 공개와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의 자해 등 여권의 미숙한 대처도 구여권에 역공의 빌미를 제공한 요인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이 취임후 보여준 국정운영 스타일은 몇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우선 무리를 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정계개편 여론이 무성한데도 김대통령은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동산투기의혹으로 물의를 빚은 주양자 보건복지부장관 문제도 ‘기다리는’ 자세로 빗발치는 여론의 경질 요구를 피해 나갔다. 전격성을 즐겼던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스타일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설득과 협의과정을 밟으려 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공직사회의 토론문화를 활성화시킨 것이나 영수회담 문호를 개방한 것 등이 그 일환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의에서 김대통령이 혼자서 얘기하는 시간이 너무 많고 국정의 모든 분야를 지나치게 세세한 부분까지 챙긴다는 지적도 많다.
김대통령 국정운영의 기조는 ‘실질’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김대통령은 종종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예를 들며 “결국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성공한 정치”라고 말한다. 실질을 중시하는 만큼 정책의 유연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김대통령이 단행한 각종 공직인사에서 잘 나타난다. 구여권인사들을 과감히 중용하는 것이나 지연배제를 강조하면서도 권력핵심부에는 ‘눈 딱 감고’ 측근들을 대거 기용한 것도 현실주의적인 그의 통치관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대통령의 집권기반은 여전히 취약하다. 그리고 도처에 암초가 널려있다. 김대통령은 집권기반 확립에 6개월정도를 잡고 있다. 아마 6월 지방선거 이후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는 김대통령이 신중한 행보를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대통령은 요즘도 측근들에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임채청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