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처가 모여 있는 정부과천청사에서는 95년 여름 ‘6―3―1―1백PPM’이란 말이 유행했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과 주요 경제부처 장차관들의 경제정책에 대한 영향력을 빗댄 말이었다. 한이헌(韓利憲)경제수석의 영향력을 6이라고 치면 이석채(李錫采)재정경제원차관은 3, 홍재형(洪在馨)부총리는 1, 박재윤(朴在潤)통상산업부장관은 1백PPM이라는 의미였다.
1백PPM은 박장관이 당시 추진하던 ‘1백PPM 운동’(생산품의 결함률을 1백PPM 이하로 줄이자는 운동)에서 따온 것이었다.
과장이 심하기는 했지만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박장관이 소외되는 실상을 제대로 풍자했다는 평을 들었다.
당시 박장관은 ‘박검토’란 별명도 얻었다. 중요 현안이 있을 때마다 뚜렷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검토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신중함이 지나쳐 우유부단한 것으로 비칠 정도였다.
2년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시절, 그는 소신발언을 하는 유일한 경제관료였다.
▼ 이경식씨 「독대」후 힘실려 ▼
문민정부 초기 박재윤수석한테서 가장 굴욕감을 느낀 사람은 이경식(李經植)부총리. 이전부총리의 설명.
“신경제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93년 4월말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조찬강연을 했습니다.‘신경제 1백일 계획과 5개년 계획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1백일 계획은 경제여건이 워낙 나쁘니 일단 경기를 좀 진작시키자는 것이고, 5개년 계획은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5개년 계획이 신경제의 줄기라면 1백일 계획은 정지(整地)작업에 해당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날 오후 이부총리는 박수석의 전화를 받았다.
“부총리님, 어떻게 1백일 계획이 정지작업입니까. 1백일 계획은 독립적인 단기계획으로 그저 ‘1백일 계획’일 뿐입니다. 앞으로 정지작업 운운하는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경제에서 1백일 동안에 성과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1백일 계획이란 명칭에는 무리가 있으며 겸손하게 정지작업 정도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이부총리의 생각이었지만 박수석의 질책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전부총리의 회고.
“93년 3월말경 금리자유화를 단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재무부 한국은행과 사전협의를 해뒀지만 박수석에게 저지당해 말을 바꿔야 했습니다. 5월까지 금융실명제 기본계획을 성안하려 했지만 역시 박수석 때문에 발이 묶였어요. 심지어 경제5단체장과의 정례조찬모임도 청와대의 견제로 할 수 없었어요.”
당시 이부총리가 얻은 별명은 ‘이(李)주사’. 직책만 부총리였지 영향력은 행정주사급이라는 말이었다.
‘경제수석의 독주에 허수아비 부총리’라는 소문이 퍼지자 박수석도 난처해졌다. 그래서 주선한 것이 부총리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독대(獨對).
그때까지 내각의 보고와 지시는 모두 박수석을 통해 이뤄졌다. 93년5월4일 첫 독대 이후 이부총리는 매주 화요일 김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조찬독대를 했다. 독대의 위력은 박수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후 ‘경제권력’이 부총리쪽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이부총리는 ‘청와대 실세’인 박수석뿐만 아니라 ‘내각의 실세’인 이인제(李仁濟)노동부장관으로부터도 상처를 입었다.
93년6월 현대그룹 계열사의 노사분규가 악화되자 이를 조기에 진정시키기 위해 이부총리 김철수(金喆壽)상공장관 이노동장관이 합동기자회견을 열어 노사가 자제할 것을 호소하기로 했다.
당시 이장관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은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므로 재검토하겠다”고 국회 노동위에서 발언해 파문이 일고 있었다.
6월21일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이장관을 자극했다.
“이부총리는 이 문제를 부처간 협의를 거쳐 마무리하겠다고 방금 말했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노동정책은 경제부처간 협의를 거친 후 결정되는 겁니까?”
발끈한 이장관이 잘라 말했다.
“노동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노동부의 고유 권한입니다. 다른 부처는 조언하고 충고할 뿐입니다.”
이부총리는 통솔력에 치명타를 입었다. 다음날 아침 김대통령과 독대한 이부총리가 사태의 전말을 보고했다. 김대통령은 즉시 울산 현대그룹 분규현장으로 내려가던 이장관을 전화로 찾았다.
“이장관, 정신이 있는거요 없는거요.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이장관이 지른 불이니까 책임지고 끄시오.”
통화를 끝낸 김대통령은 이부총리에게 말했다.
“부총리가 이해하고 (이장관을) 잘 거둬주세요. 그 사람 집에서 막내거든. 막내는 원래 고집이 좀 세지않소.”
이장관은 이 문제로 박수석과도 일합(一合)을 겨뤘다.
합동기자회견이 있기 열흘전 쯤. 노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관계장관 저녁식사모임이 있었는데 박수석도 동석했다. 한 참석자의 회고.
“무노동 부분임금 논란이 거듭되자 박수석이 그만 역정을 냈습니다. ‘어째 이장관은 자기 고집만 피웁니까’ ‘뭐라고요. 말씀 삼가세요’ ‘삼갈 게 뭐 있소. 말은 바로 해야지’ 결국 두 사람은 육탄전 일보직전까지 가고 말았습니다.”
93년 8월12일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 경제관료들의 세력판도를 일거에 뒤집어 이부총리를 실세로 부상시켰다. 발표 당일까지 실명제 실시를 까맣게 몰랐던 박수석에게는 그야말로 ‘쿠데타적 사건’이었다.
93년 말 이부총리가 쌀개방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고 정재석(丁渽錫)부총리가 10개월 가량 경제부처를 지휘했다.
이때 김대통령의 ‘경제과외교사’ 출신으로 ‘실세중의 실세’로 불렸던 한이헌씨가 재정경제원차관으로 임명됐다. 정부총리는 그에게 ‘한실세, 내 술 한잔 받지’라며 농담을 건네곤 했다.
이때부터는 박수석과 한차관, 두 사람의 신경전이 시작된다.
한씨의 회고.
“차관 시절 수석에게 몇번 전화를 했죠. 그러나 계속 연결이 안됐고 답전도 없었어요.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없는 비서한테 ‘수석에게 전화 좀 하라고 해. 내가 뭐 개인 일로 전화하나’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전화가 오더군요.”
두 사람은 대통령후보특보 시절부터 숙명의 라이벌이었다. 한씨의 술회.
“내가 일방적으로 부러워했지요. 나는 유세장을 따라다니며 연설문 작성 작업을 하고 있는데 박특보는 집권 후 경제정책을 구상하는 일을 맡았잖아요. 집권 후에는 경제정책 전반을 다뤘고…. 솔직히 질투가 났어요.”
94년10월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박수석은 정부조직 개편으로 재무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2개월만에 다시 통상산업부장관으로 옮기면서 급속히 힘을 잃는다. 통합 재정경제원의 부총리에는 홍재형씨가 임명됐다.
▼ 부총리직 넘보다 물먹어 ▼
박재윤씨는 당시 부총리를 소망했다. 자신의 전공이 화폐금융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 모임에서 박장관의 부인과 다른 참석자들 사이에 오간 대화.
“통산장관 취임을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너무 실망하고 계셔서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부총리를 원하셨는데….”
박수석 후임에는 한이헌씨가 임명됐다. 한수석은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 해제, 삼성자동차 허용 등 난제를 직접 풀어나갔다. 재경원차관에는 한수석의 절친한 친구이자 목소리 큰 이석채씨가 자리잡았다.
권력구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경제권력의 중원(中原)이 한수석에 의해 평정된 것이다. 그리고는 ‘6―3―1―1백PPM’이란 말이 탄생했다.
경제수석은 비록 차관급이지만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언제나 내각의 견제대상이 돼왔고 독주한다는 비판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석 본인들도 ‘경제대통령’이란 소리가 나올까봐 항상 신경썼다.
박전수석의 평소 지론.
“나는 대통령의 수발을 드는 비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각 부처가 하는 일을 도와주는 선으로 역할을 제한하겠다. 경제대통령이란 말은 당치않다.”
또 한수석은 취임 때 ‘전깃줄’론을 제기했다.
“대통령이 발전기이고 내각이 전등이라면 경제수석은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전깃줄에 불과하다. 빛을 내는 것은 내각의 몫이다. 전깃줄이 발전을 하거나 빛을 내려 들면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약속을 잘 지킨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중론.
두 사람 모두 “비서의 ‘비’자는 바로 감출 비자입니다. 자기를 감추고 일하라는 뜻입니다”라는 김대통령의 당부를 충실히 지키지 못했고 이 때문에 파워게임의 한가운데 서게 됐다.
김대통령은 경제관료들만 보면 이렇게 당부했다.
“똘똘 뭉쳐 일하세요. 과거 정권의 경제정책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가 각료와 청와대 참모들간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심하고….”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부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이는 신경제 실패의 직 간접적인 원인이 됐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