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각료 전원을 사퇴시킨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4월11일 일본을 방문하기 이전까지 세르게이 키리옌코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을 출범시킬 방침이라고 크렘린궁 대변인이 밝혔다. 그러나 공산당 등 야당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두마(하원)가 키리옌코의 총리인준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보여 옐친대통령과 하원이 한판 대결을 벌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개각의 배경〓중병설이 나돌던 옐친대통령이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각 총사퇴라는 급진적 방법을 택한 것은 개혁실패와 경제실정에 대한 책임을 내각에 돌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방언론은 분석하고 있다. 91년 옐친의 집권 이후 계속된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생활수준은 향상되지 않은채 범죄와 지하경제가 번창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수백만명의 공무원 군인 교사 및 일반 근로자들이 보통 2년씩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노령자와 퇴직자들의 연금지급도 수개월씩 지연되고 있어 국민의 불만이 폭발직전에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러시아인들이 생계를 위해 마피아의 보호아래 부업전선에 나서고 있고 이같은 지하경제의 번성은 탈세→세입축소→국가재정 부실→임금과 연금 체불이란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 또 최근 유가 하락으로 원유 수출이 차질을 빚어 옐친의 결단을 촉구한 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옐친대통령이 최근 건강이상으로 약해진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산당과 민족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국가두마를 통제하기 위해 내각 총사퇴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도 있다. 전략연구센터의 안드레이 피온트코프스키는 “다음달쯤 가시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두마의 정부 불신임 움직임을 사전 봉쇄하고 두마 개편을 통해 조기총선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후계구도〓이번 조치로 차기 대권 구도와 관련,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정치분석가들은 총리에서 물러난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이 사실상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알렉세이 주딘 정치연구소장은 “이번 조치가 옐친대통령의 와병중 체르노미르딘총리가 보여준 과잉행동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반면 개혁의 기수인 보리스 넴초프는 비록 제1부총리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옐친이 신뢰하는 인물이며 포고령이 발표된 직후 옐친과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이번 조치를 2000년 대선을 겨냥한 포석이라며 96년대선 때 옐친의 자금줄이었고 킹메이커를 자임하고 나선 러시아 재벌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주목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정국 전망〓국가두마가 키리옌코의 총리인준을 반대할 경우 옐친이 두마를 해산, 조기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옐친이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치밀한 계획하에 의도적으로 두마가 용인할 수 없는 인물을 기용했다는 분석마저 있다.
〈정성희·윤성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