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지금 놀라는 것은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이 자신의 배를 칼로 그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배를 그은 후 병원에 옮겨진 권씨가 변호인에게 했다는 한마디다. “패장(敗將)이 죽는 것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할 말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다. 그러나 권씨가 자신을 패장이라고 항변한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도대체 공무원인 그가 나서서 진 전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장(長)이 치른 전쟁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이든 아니든 분명히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전쟁이었어야 옳다. 당연히 그를 무릎 꿇게 한 적장(敵將)은 나라와 국민 모두의 적일 터이다. 그러나 지금 국민중 과연 누가 권씨의 적이 곧 나의 적이며 권씨의 패배가 바로 나의 패배라고 보고 있는가. 기자가 아는 한 그런 국민은 없다.
전후 사정을 보면 권씨가 말하는 전쟁은 지난 대통령선거를 지칭하는 것 같다. 정치공작으로 선거를 주무르려다 실패해 결국 사법처리 위기에 놓이자 ‘패장론’을 들먹인 것 아닌가 싶다. 안기부를 사병화(私兵化)해 ‘대선 공작 전쟁’에 나섰던 것을 반성하기보다 아직도 자신의 전쟁이 정당했다는 것을 항변키 위해 할복소동을 벌였다는 추리도 가능하다. 그게 사실이라면 권씨는 스스로를 패장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장수는커녕 졸(卒)도 못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안기부는 선거에서 특정집단을 돕자고 있는 기구가 아니다. 정치를 집권자의 편의에 따라 주무르자고 존재하는 기구일 수도 없다. 국가안위와 관련된 정보수집과 분석 집행업무를 음지에서 수행하도록 국민의 위임을 받은 기관이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사익을 위해 설치된 공작기관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씨는 이런 안기부 본연의 업무영역을 일탈했다. 자신이 우두머리로 있는 기관의 설치근거 법령을 위반하고 국민의 뜻도 거슬러 조직을 사적으로 주무른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장수라고 지칭할 수 있는가.
백가지를 양보해 권씨의 말처럼 그를 패장이라 하자. 그러면 그가 누구를 위해 ‘전쟁’을 치렀는지 따져봐야 옳다. 여야 모두가 인정하 듯 그는 김대중(金大中·DJ)후보 낙선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성경을 인용한 ‘아말렉 작전’이니 ‘흑금성’을 통한 공작이니 따위가 ‘DJ 낙선작전’임을 의심하는 국민은 없다. 다만 그가 기획하고 실천에 옮긴 작전에 지난 대선 때의 세 후보 진영 모두가 개입했고 그 과정에 치사한 거래가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는 데 국민은 분노하고 있다.
북풍의 실체를 보려면 각 당사자가 한 일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본(本)과 말(末)을 전도시켜서는 안된다. 수사가 마무리돼야 확실해지겠지만 현재는 검찰 고위관계자 말처럼 “구여권은 (북풍을) 일으키려고, 구야권은 막으려고” 움직인 것이 이번 북풍사건의 실체일 것이다. 그 과정에 안기부가 있고 안기부는 북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문제를 풀려면 순서를 바꾸어서는 안된다. 권영해 안기부가 북풍을 만든 것이 사실로 드러난 이상 왜 누구의 사주로 그런 공작을 했는지를 우선 밝히는 게 순서다. 그 다음 그런 공작 기미를 알고 막으려 한 측에 실정법위반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무조건 모두 잘못했다는 양비론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것은 어리석다.
무엇보다 국가와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직무를 악용해 선거를 왜곡하려한 사람이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패장 운운한데 현혹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민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