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 끝에 차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그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1936년 2월21일 오후 4시20분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1936)선생은 뇌일혈로 쓰러진지 사흘만에 홀연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했다. 향년 57세. 국치(國恥) 4개월전 그는 사랑하는 고국을 떠났으니 망명 26년만이요, 1928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사건으로 대만 지룽(基隆)항에서 체포되었으니 영어(囹圄) 8년째 되는 해였다.
선생의 유언은 반만 실현되었다. 화장을 모셨으나 유골은 국내에 봉안했다. 그런데 기막힌 것은 선생의 유골을 고두미(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옛 집터에 안장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한용운(韓龍雲)이 빗돌을 마련하고 오세창(吳世昌)이 서각을 하고 신백우(申伯雨)가 일제의 감시를 무릅쓰고 단재 묘소에 은밀히 비를 세웠으니 지난 독재정권때 그러했듯 그 시절에도 위대한 애국자의 무덤을 쓰는 일이 일종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나라의 멸망이라는 대파국 속에서 식민지 권력과 철저한 비타협의 길을 성성하게 걸어간 선생을 생각할 때 나태하고 부패한 오늘날 우리 지식인 사회의 해바라기성, 그 어떤 양태가 더욱 부끄러울 뿐이다.
단재는 고종 17년(1880) 충남 대덕군 산내면에서 고령 신씨 광식(光植)과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신숙주(申叔舟) 후손에서 단재를 비롯하여 신규식(申圭植) 신석우(申錫雨) 신백우 같은 지조의 애국자들이 배출된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처럼 명문의 배경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의 직계 집안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극히 몰락한 형편이어서 콩죽으로 연명할 만큼 곤궁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를 여읜 후 고두미로 이사하여 조부 성우(星雨)의 훈육 아래 성장하였다.
전통 한학의 테두리에 갇혀있던 단재는 광무(光武)원년(1897) 충청도 목천의 신기선(申箕善)을 만나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산림(山林)의 영수 임헌회(任憲晦)의 수제자로 일찍이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 참여한 개화파지만 일면 보수적이어서 독립협회와는 첨예한 대립을 보이기도 했던 신기선의 총애를 입어 단재는 광무2년(1898) 가을 성균관에 입교한다.
광무9년(1905) 2월에 성균관 박사가 되면서 마침내 단발을 결행하는 한편 비록 말년의 친일이 오욕스럽지만 구한말 최고의 계몽주의 논객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한다.
광무10년(1906) 황성신문의 폐간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옮겨 예리한 평필을 휘둘러 일제와 친일파를 공격하고 봉건적 백성을 근대적 국민으로 깨우쳐 들어올리는 계몽의 필치를 구사하여 당대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 추앙된다.
광무11년(1907)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하면서 국치 이후를 준비하던 단재는 드디어 융희(隆熙)4년(1910)4월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획하지만 자금 사정으로 여의치 않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 이를 근거지로 삼아 맹렬한 활동을 전개한다.
일제의 방해로 연해주를 떠나 상하이(上海)로 왔다가 1914년 대종교(大倧敎)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펑텐(奉天)성 화이런(懷仁)현을 새 근거지로 삼는다.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틈틈이 고구려 옛땅을 떠돌며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1915년 베이징(北京)으로 무대를 옮겨 저술활동과 동지 규합에 힘쓰는 한편 한중(韓中) 항일공동전선 결성의 구상과 그 성사를 위해 노력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해외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면서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그러나 단재는 임시정부 안의 파벌 투쟁, 특히 이승만(李承晩)의 타협적 독립운동 노선과 독재적 통치 스타일에 대한 실망으로 임정을 이탈, 1920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듬해 ‘통일책진회’를 발기한다.
1923년 무정부주의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요청으로 한국독립운동 사상 불후의 문장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다.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安昌浩)의 준비론을 모두 비판하면서 민중 직접 혁명에 의한 식민지 해방을 꿈꾸는 이 선언문은 단재가 도달한 최후의 사상적 거처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개신유학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로부터 대종교적 국수주의로, 다시 민족주의의 틀을 넘어 권력 일반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전세계적 차원의 민중 대동세계를 내다보는 아나키스트로 발전해간 단재의 사상적 행보는 눈부신 바 있다.
이후 단재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새로운 건설을 주장하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권력투쟁에 급급한 임시정부 밖에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1927년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고 이듬해 4월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베이징회의 ‘동방연맹대회’에 주동적 역할을 담당, 그 실천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국제적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었다.
물론 민족주의자 단재와 무정부주의자 단재, 어느 것이 단재의 진정한 얼굴인지를 판정하는 문제가 판가름난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는 ‘순수’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고결한 민족주의자였던 단재가 만년에 무정부주의에 다가가면서 민족주의를 넘어서려고 고투했다는 점은 인정될 터이다.
식민지 문제가 민족 사이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근대 일반의 억압성에 주목하면서 근대에 대한 치열한 대결의식을 견지했다는 점이야말로 귀중하다. 바로 이 대결의식이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본원적 성찰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 더욱 음미되어야 할 요체일 것이다.
―끝―
최원식
▼ 약력 ▼
△서울대 국문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박사 △계명대 영남대 교수 역임 △저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 근대 소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