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11월15일 인도네시아의 보고르에서 자카르타로 가는 고속도로.
보고르궁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2차 정상회담에 참석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탄 벤츠가 자카르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김대통령이 동석한 한이헌(韓利憲)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게 말을 건넸다.
“한수석, 이제 정말 국경없는 시장이 되는 시대가 열리는가 봐. 보통 일이 아닐세.”
“예,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도 개혁의 중요한 한 줄기입니다. 우리 정부는 이미 ‘국제화’를 추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국제화 세계화를 모르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래, 연말까지 국회에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안 비준도 받아야 하고 말이야. 돌아가면 준비를 단단히 하자. 미리 생각 좀 해둬라.”
다음날 자카르타에서 호주 시드니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안.
대통령이 갑자기 수행비서관회의를 소집했다.
“내일 아침 기자간담회가 예정돼 있지요. 뭐 기사거리가 될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정종욱(鄭鍾旭)외교안보수석이 나섰다.
“각하, 내일 특별한 뉴스는 없고 조금 쉬어가는 일정입니다. 그냥 편안하게 간담회를 하시지요.”
그러나 김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날 때면 ‘어떻게든 기사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회의를 한번 해보세요.”
전용기내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수석회의가 열렸으나 뾰족한 아이디어가 나올 리 없었다.
잠시 후 김대통령이 한수석을 불렀다.
“어제 우리가 얘기한 거 말이야. 세계화라고 했나 세계시장이라고 했나, 그것을 경제적인 개념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예, 세계화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내일 기자간담회 때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해보세요.”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특명이 떨어졌다.
“세계화를 경제와 접목시켜 결과를 내일 새벽까지 호주로 보고하라.”
한수석은 호텔에서 17일 새벽5시까지 작업해 대통령 말씀자료를 만들었다.
당시 국내에 남아있던 박관용(朴寬用)대통령 비서실장의 기억.
“출국하실 때까지 세계화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이 없었습니다. ‘세계화’라는 말을 전해듣고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부랴부랴 비서실과 경제기획원에 연락해 준비를 시켰지요.”
‘세계화는 호주산’이라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이었다.
17일 아침 김대통령은 묵고있던 호텔에서 수행기자들에게 ‘세계화 장기구상’을 내놓았다. 이른바 ‘시드니 구상’이다.
“세계화는 크게 두갈래로 나뉩니다. 하나는 국정의 방향을 세계화로 결집시키겠다는 내부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세계무대에서 한국이 경제규모에 걸맞은 역할을 한다는 외향적인 것이지요. 세계화를 위한 세가지 핵심과제와 다섯 가지 실천방향은….”
급조된 것이었지만 청와대 비서진의 놀라운 순발력 덕분에 꽤 번듯하게 치장됐다.
그러나 성수대교참사 세도(稅盜)비리 등 충격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터지면서 국정의 난조를 보이자 여기서 탈출하기 위한 정치적인 포석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청와대 비서실이 일단 급한 불은 껐지만 세계화 구상을 구체화하는 것은 역시 내각의 몫. 경제기획원이 바빠졌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기존에 추진해온 국제화와 세계화의 차이는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 영문표기법 싸고 해프닝 ▼
당시 기획원 한 고위관계자의 설명.
“당장 대통령이 귀국하면 대략의 실천계획이라도 보고해야 하는데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실세’인 한수석이 ‘커다란 국정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놓은 터여서 마음이 급했지요. 대통령 말에 무게는 실어줘야 하겠고…. 국제화 정책을 바닥에 놓고 위에 ‘색칠’을 했습니다.”
이틀 뒤에 열린 민자당 고위당직자회의.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김종필(金鍾泌)대표가 “세계화와 국제화가 어떻게 다르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문정수(文正秀)사무총장이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갑론을박이 한참 동안 계속된 뒤 문총장이 매듭을 지었다.
“어쨌든 우리는 국제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새로운 화두(話頭)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94년이 가고 새해를 맞았다.
1월12일 낮 서울 여의도 민자당사 부근 한정식집에서 김종필대표가 오랜만에 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했다.
김대통령이 얼마전 “당(黨)도 세계화해야 한다”고 말한 뒤 민자당의 세계화는 곧 김대표의 축출과 동의어가 돼가고 있던 시기였다.
최형우(崔炯佑)내무부장관은 좀 더 노골적으로 “당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대표제의 폐지와 경선을 통한 복수부총재 체제가 필요하다”고 못을 박아놓은 상태였다.
기자들이 세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김대표는 뜬금없이 마오쩌둥(毛澤東)을 끄집어냈다.
“내가 요즘 마오쩌둥 전기를 읽고 있는데 한마디로 형편없는 사람이더군. 마오쩌둥은 누굴 칠 때 꼭 남을 시켜 얘기를 꺼냈어. 자기는 뒤에 멀찌감치 앉아서 동정하는 척하다가 결국은 쳐버리지. 비열한 짓이야. 어떤 사람들은 날 두고 ‘언제나 소신을 죽이고 살아왔다’고들 하지. 그렇지만 난 진시황도 두려워하지 않아.”
김대통령을 향한 일갈(一喝)이었다.
그는 이미 이날 오전 확대당직자회의에서 “당의 세계화가 당 대표 퇴진을 겨냥해서는 안된다”며 극도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터였다. 회의장에 앉아있던 문정수사무총장, 강삼재(姜三載)기조실장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이틀 뒤 ‘텃밭’ 대전에 내려간 김대표의 태도는 더욱 강경했다.
“도대체 세계화와 나의 퇴진이 무슨 관계야. 뭐 날보고 세계화의 걸림돌이라고. 솔직한 얘기로 내가 (김대통령보다) 세계무대에서 활동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어.”
‘세대교체’ 얘기에 이르자 그는 더욱 흥분했다.
“예순셋 먹은 친구(최형우장관 지칭)가 예순아홉살짜리(김대표)한테 그런 소리를 해? 자기도 내일 모레면 내 나이가 되는 주제에 무슨 소리야.”
그러나 달포후인 2월19일 김대표는 대표위원직 사퇴의사를 밝혔다. 세계화의 괴력이었다. 95년 12월 민자당은 세계화를 완성한다며 당명까지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세계화를 놓고 벌어진 촌극 하나.
세계화의 영문표기를 ‘Globalization’대신 ‘Segyewha’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세계 각국의 외신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정부는 ‘기존에 통용되던 세계화나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와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인 만큼 새로운 방식의 표기가 불가피하다’고 강변했다.
▼ 구호정치가 낳은 비극 ▼
구호가 된 세계화는 김대표의 민자당 축출 외에도 몇가지 방면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삼성그룹의 승용차 사업 진입 허용(94년 12월),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제재 해제(95년 3월)에도 세계화 논리가 한몫을 했다.
94년 12월의 정부조직개편도 세계화의 부산물이었다.
박관용전비서실장의 설명.
“두어번 정부조직개편을 김대통령께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비서진을 시켜 비밀리에 준비는 시켜뒀지요. 그런데 세계화 소식이 들려와 ‘잘됐다. 조직개편에 활용하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세계화를 하면서 정부조직개편을 미루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말씀드렸지요. 연구해보라고 하시기에 그 자리에서 ‘여기 있습니다’하고 내놓았습니다.”
정부조직개편으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통합해 탄생한 ‘공룡부처’ 재정경제원의 수장이 된 홍재형(洪在馨)부총리는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성실하게 일하고 완전연소하면 된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는 홍부총리는 김대통령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95년 12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퇴진할 때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러나 재경원의 탄생은 문민경제를 꼬이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사이에 팽팽하게 유지됐던 ‘견제와 균형’이 사라졌다. 실제로 외환위기가 닥쳐오던 97년 8월부터 구 기획원 조직인 경제정책국에서는 계속 경고음을 울렸다. 그러나 구 재무부 조직인 금융정책실에 지나치게 의존한 당시 강경식(姜慶植)부총리는 이를 무시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기획원과 재무부가 분리된 체제였다면 외환정책의 난맥상이 훨씬 일찍 공론화해 강부총리의 독선을 견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96년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세계화 드라이브에 밀려 토론없이 추진됐다.
그러나 관치금융 정경유착 차입경영 정부규제 등 정작 세계화 처방이 꼭 필요한 부문에서는 세계화가 거의 진척이 없었다.
대신 외환자유화 자본시장개방 등을 무분별하게 추진하면서 반드시 함께 했어야 할 외채관리강화 금융기관건전성강화 등은 외면하는 바람에 결국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정용석(鄭鎔碩)단국대 정외과 교수는 “준비안된 OECD 가입으로 선진자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며 “지도자의 실천의지 없는 ‘구호정치’는 이런 결과를 낳게 마련”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허승호·김창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