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80년 서울의 봄, 신군부의 ‘영 커널’들은 각계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큰 절을 올리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다.
언론인을 만나서도 ‘새로운 각오’를 역설하며 잘 못하는 일이 있으면 가차없이 비판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속셈이야 어떻든 나라를 주무르게 된 젊은 장교들은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겸손이 고압자세로 바뀌며 권력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권력집중-인맥의존 경계 ▼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도 시작할 때의 결의와 각오는 대단했다.‘비판의 소리에 귀기울이겠다’‘장관은 내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함께 갈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겠다는 욕심뿐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고까운 소리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장관도 수시로 수없이 갈아치웠다.‘군화’가 밀려난 자리에 ‘등산화’와 PK들이 낙하산을 타고 줄줄이 내려앉으면서 인사는 망사(亡事)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전 국민에게 고통만 안겨준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汚名)을 얻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다. 인간의 의지는 그만큼 믿을 것이 못된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새출발할 때는 각오도 새롭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초심(初心)을 시종일관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집권초기라면 대개 전정권의 실정(失政)이 입줄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번에는 새 집권세력의 행태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욕먹어 좋아할 사람은 없겠으나 권력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싫어하면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권력의 위험신호다.
한 가정도 마음대로 안되는데 하물며 나라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어떤 방정식보다 더 풀기 어려운 일이 허다하다. 대화와 설득, 정치력으로 안될 때는 갖고 있는 힘, 권력을 쓰게 마련이다. 많은 권력자들이 걸어온 길이 그랬듯이 한번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취임 한달을 힘겹게 넘기면서 가진 기자간담회는 일단 수준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매사에 신중하고 현실적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자세를 엿보인 점에서 그렇다. 특히 야당시절에는 몰랐던 국가경영의 어려움을 새롭게 깨달은 듯한 실토나 청와대라는 구중궁궐 속에 갇혀 사람이 그립다는 토로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1백일, 6개월, 1년 뒤의 기자회견 때도 이런 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다.
김대통령은 열린 정치를 유난히 강조한다. 국정에 토론방식을 도입한 것도 새로운 시도다. 의욕은 좋지만 그러나 벌써부터 국정운영의 1인 집중과 1인 의존현상이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거기에다 제도나 시스템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인맥관계에 의존하는 양상이 두드러지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호남인맥의 ‘요직독점’에 따른 비판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요직에 앉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 기득권층으로 위치가 바뀐다. 개혁에 손을 대면서도 은연중 자신은 수혜자가 되려는 잠재의식과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 첫날의 각오 마지막까지 ▼
이 점을 경계해야 한다. 대통령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의 대다수는 아마도 자신이 임명한 인물들일 것이다. 평소 직언(直言)을 잘 하는 사람도 임명장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예스 맨’이 되기 쉽다. 그렇다면 바깥 사람을 자주 만나야 하지만 그들 또한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달간의 성적표로 앞날을 점치기는 이르다. 인(人)의 장막에 갇히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자기관리를 엄격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부단한 자기채찍이필요하다. 청와대로 들어가던 첫날의 절절했던 심정을 잊지 말아야 한다. 초심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남중구(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