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는 국내외 공연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인을 상대로 우리 민족사의 한 고비를 1백 권의 역사책보다 더 강렬하게 펼쳐 보였다.
그러나 옥의 티라 할까, 역사적 고증을 다시 한번 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진정한 명품은 정교한 마무리 세공으로 완성되는 법. 서울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앞으로 갖게될 세계 순회공연전에 보완했으면 한다.
우선 ‘명성황후’는 사후에 추존된 시호로 시해 당시(1895년)에는 ‘왕비’(세칭 민비·閔妃)가 아니라 ‘왕후’(세칭 민후·閔后)였다. 고종이 홍범(洪範)14조를 반포하고 왕족들 호칭을 한 단계씩 승격시켜 공포한 1894년 음력 12월부터 그렇게 바뀌었다. ‘왕비’와 ‘왕후’는 일대(一代)의 격차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명성황후’에서 시해당일까지 계속 ‘왕비마마’라고 부른 것은 잘못된 것 같다. 또 ‘왕비’에 ‘마마’를 붙인 것도 이상하다. ‘중전마마’라야 맞다.
대원군의 경우 극중에서 ‘대원군 저하’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저하’는 오로지 왕세자에게만 쓰는 경칭이며 대원군은 ‘합하(閤下·정일품에 대한 경칭)’ 또는 ‘대감’으로 불렸다. 대원군의 일기 및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과 매천야록(梅泉野錄) 같은 당시의 기록들로 명확히 고증된다.
역사적 인물의 등장시기와 관계 설정도 다시 살펴보자. ‘명성황후’와의 애틋한 사연으로 박수를 많이 받은 홍계훈. 그는 임오군란때 궁궐의 무예별감으로서 몸소 왕비를 업고 궁궐 밖으로 피신시켜 살려낸 생명의 은인이다. 그 뒤 10여년동안 계속 측근으로 활약했고 시해 당일 쳐들어온 일본인들을 막다가 장렬하게 숨졌다.
그런데 이 뮤지컬에서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 홍계훈을 향해 아리아 ‘그대를 어디서 보았던가’를 부른다.
고종이 단발(短髮)에 양복입은 모습으로 명성황후와 함께 외국인 외교관들을 불러 대연회를 여는 장면도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 것 같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인 1895년 음력 11월15일에 처음 단발에 양복을 입었으며 그 뒤로 다시는 곤룡포를 입지 않았다.
송우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