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 2월20일 아침 홍재형(洪在馨)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김명호(金明浩)한국은행 총재에게 전화를 했다.
“긴히 설명드릴 것이 있습니다. 점심 때 여의도 ○○식당으로 나와주십시오.”
홍부총리는 3개 금융기관 감독기구의 장인 김용진(金容鎭)은행, 백원구(白源九)증권, 이수휴(李秀烋)보험감독원장도 같은 자리에 불렀다.홍부총리는 준비해온 재경원의 한은법 개정안을 내놓았다. 모두 처음 보는 법안이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친 홍부총리는 “국회의원들과 점심을 하면서 같은 내용을 설명해야 한다”며 혼자 자리를 떴다. 남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채 점심을 마치고 총총히 헤어졌다.
2시간 후인 오후2시 재경원은 한은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이 한은총재를 겸임토록 하고 한은 산하의 은행감독원은 금융감독원으로 확대개편해 재경원 산하에 두겠다.”
▼ 직원들 모아놓고 이론무장
재경원의 기세는 무서웠다. 이석채(李錫采)재경원차관은 발표 직후 사무관급 이상 전직원을 강당에 소집, 한은법 문제에 대한 이론무장을 시켰다.
그는 “재경원 인원은 8백명 뿐이지만 한은은 3천명이 넘는다. 한사람이 한은보다 4배 이상의 홍보를 하지 못하면 진다”며 독전(督戰)했다.
금융단체에는 정부안을 지지해달라는 압력이 들어갔다. 이상철(李相哲)은행연합회장이 지지발언을 했고 이틀 뒤 연영규(延瑛奎)증권업협회장 등 7개 금융기관 협회장이 모여 “금융감독원 발족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곽후섭(郭厚燮)상호신용금고연합회장은 정기총회에서 갑자기 “재경원에서 지지를 부탁받았다”며 결의를 제안했다.
그러나 ‘왜 우리와 관련없는 일에 끼여드느냐’며 참석자들이 반발하자 “그러면 금융감독원 신설 대목에만 찬성하자”고 후퇴, 가까스로 결의를 끌어냈다.
재경원은 법안 발표 8일만에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 상정까지 마쳤다.
입법예고 절차는 생략됐고 경제차관회의 심의도 빼먹었다. 경제장관회의에서는 배경만 설명했다.서상목(徐相穆)보건사회부장관 등 일부 장관들이 “몰아붙일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국회 재무위에서 외국의 실태까지 조사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지 않았느냐”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재경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경원이 조바심을 낸데는 법안발표 4일 전에 나온 경제학자 1천54명의 ‘한은 독립촉구’성명도 한몫했다. 김태동(金泰東·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성균관대교수가 주도한 이 성명에는 현 한은총재인 전철환(全哲煥)충남대교수도 서명했다.
한은은 결사항전의 각오였다.
“정부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분신으로 대응하겠습니다.”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올린 사람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바라보는 한은 부부장급 간부였다.정부 법안은 야당과 여론의 반대에 부닥쳐 96년 5월 14대 국회 폐막으로 자동폐기됐다.
문민정부의 한은법 파동 2라운드에서는 주역들이 모두 바뀌었다.
97년 6월4일 저녁 청와대 서별관.
강경식(姜慶植)부총리 박성용(朴晟容)금융개혁위원장 이경식(李經植)한은총재 김인호(金仁浩)경제수석 등 ‘금융개혁 4인방’이 비밀리에 회동했다.
금개위가 바로 전날 재경원의 생각과는 달리 ‘한은에 은행의 건전성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시안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에게 보고한 직후 강부총리의 제안으로 마련된 모임이었다.
강부총리가 말문을 열었다.
“중앙은행 독립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금융통화위원회 밑에 사무국은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부총리의 중앙은행 독립 지지발언으로 분위기는 밝았다.
6월12일 한은 창립기념식에서 이총재는 “통화가치의 안정을 위해 금융기관 건전성과 관련된 규제는 한은에 있어야 한다”며 은행감독원 분리에 반대한다는 뜻을 시사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4인회동에서 이총재는 은감원 분리 내용이 포함된 한은법 개정안에 동의했다.
결국 4자 합의조정안은 16일 재경원 청사에서 김인호수석을 제외한 3인에 의해 발표됐다.
이전총재 측근의 설명.
“이총재는 한은법과 관련해 지나치게 유연했어요. 금통위 사무국 설치안은 이를 매개로 한은을 통제하려는 재경원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이총재는 사무국을 금통위의 문서수발 조직 정도로 생각했어요. 반대하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도 ‘그게 그런 뜻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니까요.”
이총재의 반론.
“한은 직원들은 마치 해방 직후 일본을 대하듯 재경원을 보았어요. 피해의식이지요. 직원 정서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합의내용을 함부로 번복할 순 없잖아요. 또 건전성을 규제할 권한만 보장된다면 나머지 감독권한을 모두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감독기능을 독점하면 정부가 간섭할 소지도 있어요.”
이총재는 원래부터 한은 직원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89년 한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때 그는 금통위원이었다. 그는 ‘한은법 개정은 장기과제로 유보하고 우선 중앙은행의 자율적 운영관행을 정착시키자. 중앙은행은 정부와 국민경제 발전에 협조해야 한다’는 친정부적인 내용의 금통위 답신서를 직접 작성했다.
한은 직원들은 다시 한번 반발했다.
이총재도 뒤늦게나마 남덕우(南悳祐)전총리 등 원로들과의 모임을 통해 직원 의견을 개정안에 반영하기 위해 애썼다. ‘한은총재가 금통위의장을 겸하며, 금통위는 한은 내부기구로 한다’고 수정한 것은 작은 성과중 하나였다.
한은법 파동은 외환위기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97년11월 강부총리는 “한은의 극한투쟁으로 금융감독체계의 골간인 중앙은행법 개정이 지연되면서 국가신인도가 떨어졌다”고 선언했다.
이총재는 버럭 역정을 냈다.
“그 사람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지. 외환위기가 발등에 떨어졌는데 엉뚱하게 한은법 통과에만 집착하다니….”
한은법 개정안은 대선 직후 열린 임시국회에서 ‘시급한 금융개혁’의 명분아래 통과됐다.
이총재 퇴진운동을 벌이던 한은 노조는 급기야 ‘이경식을 구속하라’고 구호를 바꿨다.
이총재는 괴로워했다.
“빨리 떠나고 싶다. 직원들의 신뢰를 못받으면서 자리를 지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외환위기 와중에 사임할 수도 없어 꾹 참고 지냈다.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조인이 이뤄진지 닷새 뒤인 12월8일 그는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퇴임은 올 3월6일에야 이뤄졌다.
이임식장에서 악수를 하던 그는 한 외환관련 간부와 마주쳤다.
“자네는 머지않아 보겠군.”
경제청문회를 의식한 말이었다.
이경식씨는 93년 12월19일 쌀개방에 대한 책임을 지고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가 95년 8월 한은총재로 임명된 사람.
한은 고위간부의 회고.
“96년 10월 이총재로부터 한은법 개정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진선진미한 한은법을 만들고 싶어했어요. ‘지금까지의 논란은 아예 잊고 백지 위에 그린다고 생각하면서 개정안을 만들라’고 하더군요.”
▼ “4년임기 채운다” 장담
한은법 파동 직전까지만 해도 이총재는 “나는 책임져야 할 일이 없는 한 4년 임기를 채운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임기는 채우는 것이 바로 한은독립의 길이다”며 자신있게 말했다.
그러나 이총재는 은감원을 내주는 바람에 한은 직원들로부터 ‘중앙은행의 배신자’로 몰렸고 외환위기로 결국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밀턴 프리드먼 미 시카고대 교수의 저서 ‘돈의 이야기(Money Mischief)’엔 이런 구절이 있다.
‘돈이 늘어나면 인플레가 나타나고 곧 명목이자율이 높아진다. 이 때문에 브라질 칠레 이스라엘 한국처럼 통화량과 물가의 급격한 상승을 겪은 나라에서는 이자율이 높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 독립된 중앙은행이 필요하다.’ 부끄럽게도 중앙은행 독립이 시원찮아 인플레와 고금리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나라로 한국을 지목한 것이다.
문민정부는 이처럼 중요한 중앙은행독립 문제를 ‘갖은 술수가 동원된 밥그릇싸움’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다.
〈허승호·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