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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동포의 오늘 ①]장환철씨의 비극

입력 | 1998-04-01 14:30:00


《동아일보는 한국과 구 소련과의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한국언론의 소련 취재가 불가능하던 88년 4월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신문이 사할린의 한인 실태를 다룬 특집기사를 ‘사할린동포의 오늘’이란 제목으로 특별전재한 바 있습니다. 이 기사는 당시 한일 양국의 여론을 움직여 사할린 한인들의 고향방문과 영주귀국을 실현시키는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동아일보는 그후 10년이 경과함에 따라 이번에 다시 홋카이도 신문과 공동으로 사할린과 한국에서 사할린 한인문제를 조명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이번 연재물은 한일 양국의 언론이 과거사 문제를 공동취재한 최초의 기획으로 가깝고도 먼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를 딛고 우호의 길을 모색해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사 특별취재반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동아일보〓한기흥 정치부 기자

▼ 홋카이도(北海道)신문〓아오키 다카나오(靑木隆直)도쿄지사 외보부차장 이토 가즈야(伊藤一哉)모스크바특파원 가로우지 마사타카(唐牛將貴)사진부차장》

지난 2월26일 정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函館)공항에서 러시아 아에로플로트항공소속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이륙한 지 1시간. 창 밖으로 빙해(氷海)가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운동장만한 것에서부터 모자이크 조각만한 것까지 크고 작은 얼음의 박편(薄片)이 끝없이 어지럽게 펼쳐진 바다는 유난히 시퍼렇게 보였다.

사할린. 러시아인들조차 두려워했다는 그 동토(凍土)의 섬에는 망향의 한을 품고 살아온 한인들의 슬픈 사연이 아직도 저마다의 가슴에 응어리진 채 남아 있다.

취재진은 2월28일 사할린 남서쪽 바닷가에 있는 고르노자보츠크라는 탄광촌을 찾았다. 10년전 이곳을 방문했던 홋카이도신문 기자들에게 “사할린에 있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서라도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절규했던 장환철(蔣煥哲)씨의 유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경남 밀양 출생인 장씨는 26세였던 1942년 일본정부에 의해 광원으로 징용돼 이곳에 왔다. 당시 임신한 젊은 아내를 두고 온 장씨는 일본이 패망한 뒤 귀국길이 막히자 11년을 혼자 살다 56년 홋카이도 출신인 김찰자(金札子·69)씨와 재혼, 아들 셋을 낳았다. 장씨는 90년 5월 꿈에도 그리던 한국을 방문, 48년만에 가족들과 상봉하고 사할린으로 돌아 왔으나 93년 10월19일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에게 밝히기 어려운 내밀한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장씨의 부인 김씨는 먼저 질문을 던진 이토 가즈야(伊藤一哉)기자의 물음에 유창한 일본말로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의 상황을 얘기했다.

“돌아가기 며칠 전부터 계속 울기만 했어요. 라디오를 가슴 위에 올려 놓고 KBS방송을 들으며 라디오와 대화를 나누다 울곤 했습니다. 또 하루에 보드카 두병을 마셔야 할 정도로 늘 술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씨의 이런 증세는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김씨는 장씨가 오래 전부터 밤낮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술에 의존해 살았다고 했다. “평소에도 고향생각이 나면 입버릇처럼 죽겠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앞에선 빨랫줄도 내걸지 못했어요. 저도 욕을 많이 보고 이웃들도 참 많이 혼났습니다. 그 사람 나중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첫 결혼에 실패하고 장씨와 재혼했던 김씨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가 한국인이었지만 홋카이도 아사히카와(旭川)에서 태어나 일곱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던 김씨를 남편이 일본여자로 간주,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이 일본여자라고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어요. 혼날까봐 남편 앞에선 일본말도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사실 김씨는 한국보다 일본에 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가친척도 없고 한번도 가 본 일이 없는 한국은 조국이라는 생각이 안들지만 일본은 고향이라는 게 그녀의 말이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홋카이도에 가보고 싶어요. 한국에 가면 남편의 여자도 있고 아들도 있는데 내가 가봐야 첩밖에 더 됩니까.” 그러나 김씨는 한국을 그리워했던 남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인터뷰를 마친 뒤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는 김씨의 뜻에 따라 근처에 사는 3남 사샤(38)의 아파트로 장소를 옮겼다. 사샤는 대부분의 한인 2세들처럼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통역을 통해 대화했다.

아버지를 따라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아버지가 그때 참 기뻐했다”며 “아버지는 사할린에 돌아온 뒤 온가족과 함께라면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기자는 사샤의 러시아 부인 일리나(39)와 아들 안드레이(18), 딸 라리샤(17)가 분주히 음식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한 가정이 정서적으로 한국 일본 러시아인으로 나뉘어 산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보았다. 사샤는 “대답하기 힘든 문제”라며 잠시 망설이다 “각자 자기의 조국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3월10일. 기자는 홋카이도신문 도쿄(東京)지사의 아오키 다카나오(靑木隆直)외보부차장 등과 함께 부산에 사는 장씨의 본부인 L씨(78)와 아들 J씨(56)의 집을 찾았다. 때마침 집에 있던 J씨에게 사할린에서 취재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뜻밖에도 그는 아버지의 사망경위를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94년 사할린에서 영주귀국한 친척을 통해 아버지가 숨진 사실은 전해 들었지만 사인이 노환인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난감해진 취재진이 화제를 바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동안 노인대학에 갔던 장씨의 부인 L씨가 돌아왔다.

그녀는 22세에 사실상의 청상과부가 돼 홀로 아들을 키워온 지난 세월에 대해 “팔자려니 생각하고 살았다”며 “전에는 일본을 원망했지만 기왕에 지나간 일이니 더이상 비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J씨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상처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말을 하지 않고 혼자 갈등을 안고 컸어요. 아버지가 한국에 오셨을 때 한을 푼 것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취재진과 동행한 중소이산가족협회 이두훈(李斗勳)회장은 “장씨는 한국에 와보니 가족에게 아무 도움이 못된 채 짐만 되는 것을 깨닫고 사할린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취재를 끝낼 무렵 J씨는 눈시울을 붉힌 채 떨리는 목소리로 취재진을 원망했다.

“차라리 안들은 것만 못해요. 아예 모르는 게 더 나았어요. 들어서 불행해진다면 알리지 말았어야죠.” 그의 부인은 “사실 시어머니와 저는 시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었지만 남편이 평소 술을 마시면 ‘아버지 아버지’하며 울기 때문에 이를 알리지 못했었다”고 귀띔해줬다.

J씨는 이복형제들과 아버지 유해의 한국 봉환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올 8월쯤 사할린을 방문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