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암스트롱의 로켓이 달에 닿기도 전에 그 가능성을 그려보인 것은 1902년 조르주 멜리에스감독의 영화 ‘달나라여행’이었다. 인간은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능력이 있고 영화에는 상상을 한껏 펼칠수 있는 마당이 있다. 21세기, 새 밀레니엄에는 어떤 현실이 다가올까. 영화속에 나타난 미래를 통해 상상해보면….》
“나는 세상의 왕이다!”
지난달 24일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을 움켜쥔 제임스 카메론이 외친 소리다. 86년 ‘에이리언(Alien·외계인)2’를 연출했을 때만 해도 그는 신인이었다. 폭발적 화제를 모았던 리들리 스코트감독의 ‘에이리언’(79년)속편을 카메론이 만든다고 하자 제작사인 20세기폭스의 주가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메론은 ‘에이리언2’를 성공시켰고, 3편 데이비드 핀처(92년), 4편 장 피에르 주네(97년)까지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감독이 속편을 만듦으로써 ‘에이리언’은 진화를 거듭했다.
1편의 배경은 우주항해가 보통일이 된 2000년대의 어느날. 2편은 그로부터 57년 후, 3편엔 뚜렷한 언급이 없지만 4편은 또 그로부터 2백년 후에 벌어진 일을 담고 있다. ‘에이리언’ 시리즈 속의 새 밀레니엄은 테크놀러지가 빚은 암울한 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우선 ‘에이리언’속의 사회를 보자.
우주선 노스트로모호는 사회의 축소판이자 소우주다. 오로지 컴퓨터에 의해 통제되는 폐쇄 고립사회. “능력에 따라 정확히 평가되는 조직사회가 좋다”는 승무원들의 말도 나온다.
이들을 지배하는 자는 ‘회사’다. 완벽한 생명체인 에이리언을 생체무기 또는 돈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의 목숨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철저한 비인간적 조직이다. 그래서 2편에서 여주인공 시고니 위버는 회사의 끄나풀에게 “이 에이리언만도 못한 인간아!”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둘째, 테크놀러지는 그 쓰임새에 따라 엄청난 비극을 낳는다는 경고가 있다.
3편에서 에이리언을 뱃속에 품은 채 불속에 뛰어들었던 시고니 위버가 4편에선 DNA복제로 부활한다. 이처럼 테크놀러지는 엄청난 진보를 안겨주지만 영화속에서는 에이리언과 똑같은 공격과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1편에서 에이리언과 함께 인간에게 덤벼든 것은 ‘마더’라고 불리는 컴퓨터와 과학로봇이었다. 에이리언처럼 영원히 변치않는 사악한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 다름아닌 회사다. ‘인간에 대한 예의’없이, 특정목적으로 테크놀러지가 쓰여지는 순간이 바로 디스토피아임을 영화는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셋째, ‘에이리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래상은 강인한 모성을 지닌 여전사(女戰士) 시고니 위버의 등장이다.
반면 점액질이 뚝뚝 흐르는, 남근을 연상케 하는 모습의 에이리언(스위스 화가 HR기거가 그렸다)이 없애야 할 대상으로 나온다는 점, 에이리언이 주로 남자들의 배를 찢고 튀어나온다는 점 등도 의미심장하다. 갈수록 기세등등해지는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들의 무의식적 공포를 반영한다는 풀이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새로운 밀레니엄, 첨단 테크놀러지의 시대에 파충류처럼 가장 원시적으로 생겨먹은 에이리언이 왜 끈질기게 인간을 공격하는 것일까.
에이리언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 공포와 불안, 내부의 적(敵)과 악을 상징한다. 이빨 속에 있는 또하나의 이빨은 우리 내부의 추악한 본질이며 물질물명만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끔찍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 에이리언을 물리친 유일한 생존자는 늘 깨어 있던 여자, 시고니 위버였다.
〈김순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