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반년 쯤 지난 93년 9월 중순 서울 시내 모처.
이경식(李經植)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만났다.
현철씨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아니 부총리님, 지금 금융실명제 때문에 기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부도 직전에 몰린 기업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이부총리가 즉각 쏘아붙였다.
“이것 보세요, 김소장(현철씨에 대한 당시 통칭),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실명제를 시작한줄 아세요. 정부가 그렇게 일하지는 않아요.”
이런 대화로 분위기는 썰렁해졌고 머쓱해진 현철씨는 곧 자리를 떴다.
▼ 현철씨도 까맣게 몰라 ▼
그로부터 5년 뒤인 98년 2월.
현철씨가 실명제 실시 직후인 93년 10월 안기부 계좌를 이용해 대선 당시 쓰고 남은 비자금 50억원을 변칙으로 실명전환한 사실이 검찰수사에서 뒤늦게 밝혀졌다.
이는 현철씨가 금융실명제 실시를 사전에 몰랐음을 보여준 대목이다.‘비밀은 가족에게도 지켜야 한다’는 김대통령의 보안의식을 잘 보여준 생생한 사례이기도 하다.
실명제는 김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만큼 이부총리나 홍재형(洪在馨)재무부장관 등은 언젠가 실시될 것으로 생각하고 직원들에게 실명제에 대해 자문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박관용(朴寬用)전청와대 비서실장은 “당시 김대통령은 개혁 얘기만 나오면 실명제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고 말했다.
실명제 작업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93년 6월29일. 김대통령과 이부총리의 매주 화요일 정례 독대자리에서였다.
조금 짧게 보고를 마친 이부총리가 먼저 물었다.
“각하, 실명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말이야, 어떻게 해야 좋지. 터놓고 얘기도 못하겠고…. 하기는 해야겠는데 고민이야.”
이부총리가 말을 받았다.
“빨리 해치웁시다. 조기에 실시하자는 의견과 94년 상반기 이후 경제가 안정된 다음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여론은 후자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9월 이전에 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8월 이외에는 날짜가 없습니다.”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준비에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2개월이면 충분합니다. 다만 성장률이 초기에 1∼2% 떨어질 겁니다.”
“세가지 원칙을 지킵시다. 빨리, 완벽한 내용, 그리고 보안이오. 한꺼번에 실시합시다. 역시 대통령 긴급명령밖에 없어요.”
김대통령은 집무실에 있던 법전에서 접어뒀던 긴급명령페이지를 펴보이며 말했다.
부총리는 집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양수길(楊秀吉·현 경제협력개발기구대사 내정자)자문관을 불렀다.
“양박사, 이제부터 금융실명제를 준비해야겠소. 긴급명령으로 8월말 이전에 실시하자는 결심이 있었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김준일(金俊逸)박사와 함께 일하세요.”
양전자문관은 순간 ‘아! 드디어’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예, 남상우(南相祐)박사도 참여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7월8일 이부총리가 KDI팀이 기초한 실명제 시행시안을 김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
“각하, 박관용비서실장과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 홍재무장관 세사람은 알아야 일이 추진되겠습니다.”
“박실장과 홍장관에게는 내가 직접 알리죠. 박수석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아요. 박수석에게는 알리지마세요.”박수석이 실명제 실시과정에서 배제되는 순간이었다.
과천청사에 돌아온 이부총리로부터 비밀 사무실을 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양자문관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휘문고 옆 금자탑빌딩 2층에 ‘국제투자연구원’이란 유령연구소를 급히 개설했다.
또 홍장관은 김용진(金容鎭)세제실장 김진표(金振杓)국장 임지순 진동수과장 백운찬사무관으로 작업팀을 구성했다. 마침내 KDI팀은 13일 홍장관에게 시안을 보고했다.
재무부팀은 며칠 뒤 과천 주공아파트 505동 304호를 아지트로 정하고 KDI팀을 끌어들였다.
그 후 재무부 국세청 법제처 직원들과 국민은행 김모과장 등이 차례로 합류했다. 실명제 추진작업을 아는 사람은 김대통령을 포함해 모두 18명이었다.
실명제 추진의 핵심은 ‘보안’이었다.
이미 김대통령은 이부총리에게 “목숨을 걸고 보안을 지키라”고 신신당부해놓은 터였다. 기밀이 새면 실무진 전원을 구속하겠다는 엄명과 함께 사표까지 받아뒀다.
이부총리가 양자문관에게 일을 맡긴 것도 기획원 재무부 한국은행의 일상 라인을 동원하면 출입기자들이 눈치를 챌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KDI팀은 대치동 아지트에 들어가기 전에는 밤중에 이부총리의 논현동 자택에서 회동하곤 했다. 이부총리는 ‘집식구 때문에 비밀이 샐 우려가 있다’며 옆집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마침 이부총리가 살던 공동주택의 옆집이 분양이 안돼 비어있었던 것.
홍장관도 보안을 위해 KDI팀의 첫 보고를 여의도 기술신용보증기금 이사장실에서 받았다. 홍장관은 평소 이사장이 부산 본사에 주로 있는 관계로 비어있던 이사장실을 국회 답변자료를 검토할 때나 휴식을 취할 때 이용하곤 했다.
실무작업중 보안유지를 위해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8월 초 재무부 임지순 세제실과장은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예요.”
“미국 뉴욕의 조그만 호텔이오.”
임과장은 사실 과천 아지트에서 전화를 걸었지만 부인에게는 미국에 출장간 것으로 돼 있었다.
임과장은 출장명령을 받고 짐을 챙겨 사무실에 나갔다가 백모사무관의 르망승용차편으로 김포공항으로 가던 중 공항 입구에서 갑자기 과천 아지트로 ‘납치’돼버렸다.
당시는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세제개편작업이 한참 진행되던 때였다. 세제실 직원을 빼낸다는 것은 더 중요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해외출장 명령. 합숙멤버로 뽑힌 임과장과 최모, 임모사무관 등 3명이 해외출장 대상자였다.
‘각국의 실명제 연구’라는 출장목적으로 기간은 40일로 정해졌다. 실명제 연구를 위해 출장을 보낸다니 누가 봐도 실명제 실시시기는 빨라야 94년 이후라고 생각하게끔 한 것이었다.
보안의 절정은 역시 김대통령이었다.
실명제 추진 통보대상에서 제외된 박재윤수석이 8월 초 김대통령에게 실명제 실시방안을 보고하겠다고 밝혔다. 김대통령은 ‘부총리가 주책없이 비밀을 흘렸구나’하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박수석의 보고는 ‘시행시기를 94년으로 미루고 그 전에 금리자유화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김대통령은 보고를 듣고 나서 “지금은 논의할 시기가 아니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보고서는 모두 파기하시오”라며 자기가 갖고 있던 서류까지 건네줬다.
박수석은 물러나와 원본을 포함한 보고서 3부를 몽땅 종이파쇄기에 넣어버렸다.
▼YS, 朴수석에 연막작전 ▼
드디어 8월12일 ‘개혁중의 개혁’이라던 금융실명제는 탄생했고 이부총리와 홍장관 김실장 양자문관은 ‘실명제 공신’으로 김대통령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박비서실장은 박수석에게 다른 수석들보다 1시간 빠른 이날 오후4시쯤 통보했다. 박수석은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97년 9월말 김대통령은 이부총리와 홍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함께 했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던 김대통령이었지만 이날은 막걸리를 준비했다.
“홍장관, 실명제 때문에 정말 금융대란이 오겠소?”
“절대 안옵니다. 걱정 마십시오.”
김대통령을 포함해 각자 두되씩은 마셨다는 것이 홍장관의 기억. 김대통령이 술을 그렇게 마신 것은 퇴임 때까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실명제의 운명은 실시 4년 후인 97년 말 여야가 금융실명제 대체입법을 통과시키면서 비극을 맞게 됐다.
금융종합과세는 무기한 연기되고 매입자금의 출처를 묻지 않는 장기채를 1년간 발행해 변칙 상속증여 등 ‘검은 거래’가 허용됐기 때문이다.
문민개혁의 상징인 금융실명제는 화려하게 출발했지만 결국 경제정책의 실패로 빛을 잃고 김대통령의 처지와 비슷한 신세가 돼버렸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