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인 48년4월3일, 제주에서는 군 경의 횡포와 잔혹행위 그리고 남한의 단독선거에 저항해 일부 도민이 무장 궐기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빨갱이 잡기’가 전개됐고 그해 11월17일에는 계엄령하에 제주도 해안선에서 5㎞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자행됐다. 어린아이들부터 할머니까지 죄없는 양민이 3만 혹은 5만명 이상 희생됐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이 사건을 미군정하 미군의 지휘 통제아래 저질러진 것으로 규정한다. 이 반인륜적 범죄는 동서냉전과 남북분단의 산물인 까닭에 가해자 편에 섰던 사람이나 피해자 모두 역사와 구조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그동안 냉전의 심화, 분단의 고착화 과정 속에서 그리고 반민주적인 권위주의 권력하에서 ‘제주4·3’은 입에 올릴 수 조차 없었다. 논의조차 금기시됐고 죄없이 죽은 양민의 자손들까지 연좌제 아래 고통받았다. 난을 피해 일본으로 떠났던 이들은 고향을 찾아올 수 없었다. 살아있는 자들의 역사도피증과 냉소주의, 피해망상증과 공포증 등 ‘4·3증후군’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마음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다.
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험악한 군사정권하에서 뜻있는 이들은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고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6·10 민주항쟁을 거치며 포악한 독재권력은 굴복하여 이땅에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제주사람들도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진상규명작업이 시작됐다. 대선, 총선 관계없이 정치인들은 한결같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외쳤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 제주사람들은 ‘4·3’이 정치판에서 이용되고 있다고 분노하고 있다.
민족통일국가의 수립과 성숙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란 과제를 안은 국민정부는 ‘4·3’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의 책무 또한 부여받고 있다. 김대중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제주4·3’의 진상규명과 위령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양식있는 이 땅의 사람들은 기대한다. 50주년을 맞아 새 민주정부가 ‘역사진실찾기’운동의 하나로 ‘제주4·3’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여 50년 한을 풀어줄 것을.
강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