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7월20일 이경식(李經植) 부총리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게 실명제 계획을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부총리의 보고를 들은 김대통령은 뜻밖의 주문을 내놓았다.
“이부총리, 김의원 알지요. 그 사람 92년에 D그룹에 땅을 팔았어요. 그 돈이 어디 숨어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실명제를 하세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금융시장이 무너집니다.”
“아니, 그런거 들여다보자고 하는 게 바로 금융실명제 아닙니까?”
“각하, 실명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김대통령이 언급한 김모의원은 민자당에 있다가 92년 대선때 다른 후보의 선거캠프로 간 정치인이었다.
당적을 옮기기 전에 김의원은 서울 여의도에 있던 땅을 40억원 가량 받고 판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며칠 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실명제 실무팀 아지트.
이부총리 홍재형(洪在馨)재무부장관 김용진(金容鎭)재무부세제실장 양수길(楊秀吉)부총리자문관 등이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았다.
이부총리가 ‘김의원 땅 판 돈’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 하지, 대통령이 김의원 얘기를 하시더군. 대통령은 모든 자금추적이 가능하도록 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김실장 등 실무팀이 펄쩍 뛰었다.
“경제를 망치는 일입니다. 실명제는 과거의 비리를 캐어 벌을 주자는 것이 아니라 금융시장 정상화와 공평과세의 문제라는 인식을 대통령에게 꼭 심어주십시오.”
김대통령은 실명제를 ‘경제제도’로 보기 보다는 사정(司正)과 사회정의 등 ‘정치적 시각’에서 파악했던 것이다.
민주계 한 측근의 설명.
“김대통령은 정주영(鄭周永)씨가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에 나오는 것을 보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돈 안드는 정치를 만들고 ‘검은 돈’의 정치권 유입을 막으려면 실명제가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던 거죠.”
93년6월29일 이부총리가 실명제 조기실시를 처음 진언할 때 김대통령이 금방 동의한 것도 동원된 논리가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김대통령의 귀에 쏙 들어갔기 때문.
김대통령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이부총리는 당시 이렇게 김대통령을 설득했다.
“각하, 8월 말까지 실명제를 해치워야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사정과 재산공개, 정치자금 수수거부선언 등 각종 개혁조치에도 불구하고 9월 정기국회때 재야와 야당이 정치공세를 펼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의 개혁업적이 크게 퇴색하게 됩니다. 둘째, 만약 실명제를 94년쯤 실시하면 후유증 치유에 1년 이상 걸리므로 임기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각하는 재임중 아무런 경제적 치적을 거둘 수 없으며 ‘경제 대통령’이란 평가도 포기해야 합니다. 셋째, 실명제 논의의 역사는 실명제가 통상적인 국회논의를 통해서는 결코 도입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할 수밖에 없는데 9월에는 국회가 열리기 때문에 긴급명령 발동이 불가능해집니다.”
김대통령은 무릎을 치며 화답했다.
“그래 맞아! 부총리,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 똑같지?”
이날 대화로 이부총리는 김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됐다. 실명제 준비의 대임(大任)이 홍재무장관에서 이부총리에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금융실명제는 금융은 물론 세제와 직결된 일인 만큼 경제기획원이 아니라 재무부의 소관사항이었다. 김대통령도 이같은 업무분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93년5월 홍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칼국수 점심을 내며 자문했다.
홍장관은 “실명제 도입방법으로는 정상적인 공론화 절차를 밟는 것과 긴급명령 등 두가지가 있는데 각각 일장일단이 있습니다”라며 답변을 시작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선택은 분명했다.
“홍장관, 정치인들은 실명제 같은 거 싫어합니다. 공론화하면 퇴색하게 마련이고 실제로 시행할 수도 없어요.”
이어 돈의 과거를 묻는 문제와 관련해 홍장관은 “돈이란 내외(內外)간에도 비밀이 있는 물건입니다. 속속들이 끄집어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며 이른바 ‘뒤주론’을 피력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뇌리에는 ‘빗자루로 구석구석 쓸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홍장관은 6월의 두번째 김대통령 독대 때 “앞으로 실명제와 관련된 지시는 이부총리를 통해 내려주십시오”라며 주도권을 스스로 양보했다.
사실 김대통령이 이부총리와 실명제를 논의한 것은 이날(6월29일)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부총리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그러나 이부총리의 얘기에 만족한 김대통령은 즉석에서 지시를 내렸다.
“그래 부총리, 골격은 언제쯤 보고할 수 있겠소.”
홍장관의 태도가 너무 미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김대통령은 이부총리가 입맛에 딱 맞는 보고를 하자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을 맡겨버린 것.
금융실명제에 대한 김대통령의 정치적 관심은 실명제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7월8일 최초로 이부총리가 김대통령에게 제출한 실명제안(案)은 양수길(楊秀吉)부총리자문관 등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사팀이 만든 것이었다.
이 안은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물리는 부담금인 이른바 도강세(渡江稅)의 허용여부, 과징금 부과비율, 무기명채권 발행여부 등 모든 주요사항에 1안, 2안 식으로 복수안을 제시했다.
김대통령은 복수안 중 일관되게 ‘강한 쪽’을 선택했다. 사실 KDI의 복수안은 모두 뒷날 발표된 것보다 엄청나게 강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실명 미전환 예금의 처리와 관련, 김대통령은 ‘실명전환 의무기간이 경과하는 즉시 이자전액 몰수, 전환기간 2년 후에는 원금까지 몰수’하는 무시무시한 방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재무부팀이 ‘100% 몰수는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위헌결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반대해 겨우 완화했다.
이전부총리는 “KDI팀 보고서가 김대통령이나 나의 생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KDI팀에 속하는 양수길씨는 “이부총리 등이 청와대에 다녀오면 내용이 당초 시안쪽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용진씨의 기억.
“자칫 실명제가 사람까지 잡는 도구가 되겠더군요. 안되겠다 싶어 비밀보장 조항을 대폭 강화하자고 했어요. 명칭도 좀 길기는 하지만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바꾸자고 주장해 관철했지요.”
김대통령의 담화와 함께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서서히 ‘괴력’을 발휘했다. 시행 2년만인 95년 10월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의 5천억원 규모의 비자금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가 관리해온 대선자금의 잔금이 밝혀진 것도 결국 실명제의 공로였다.
노전대통령의 비자금은 김대통령의 대선자금과 연계되는 사안이었고, 현철씨 비자금은 김대통령 본인에게 직격탄이 되었다.
당초 생각했던 ‘김모의원 땅 판 돈’과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대어(大魚)’들이었지만 실명제는 김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어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95년 부총리로 승진한 홍재형씨가 대체입법을 은밀히 건의하자 김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했다.
“부총리가 정치판을 잘 몰라서 하는 말씀 같은데 정치인들은 실명제 싫어합니다. 국회에 가면 변질돼요. 실명제가 관행으로 완전히 굳어진 다음에 법률로 바꿉시다.”
말이 씨가 됐을까. 금융실명제는 ‘정치 9단’인 김대통령을 꽤나 괴롭혔고 97년 대체입법 때는 심각하게 변질되고 말았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