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영화 ‘블레이드 러너’(감독 리들리 스코트)에 등장하는 미래 도시는 산성비와 폐허로 뒤덮인 어둠의 공간이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음습한 거리에는 쾌적한 우주 식민지로 이주하지 못한 소외된 이방인들만 남았다.
더욱 암울한 것은 ‘전투용’ ‘위안용’ 복제인간을 만들어 노예로 부리는 인간의 끔찍한 창조성이다. 복제인간의 수명은 4년뿐.
발달된 기술은 감정의 경력이 없는 복제인간에게 추억조차 이식시켰다. 스스로를 인간이라 믿고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는 복제인간, 우리의 또다른 모습을 향해 인간은 총을 겨눈다.
“공포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기분이야.”
추격자를 거꾸로 궁지에 몰아넣은 복제인간의 섬뜩한 질문은 다 쓴 1회용 컵을 구겨 버리듯 필요가 다한 복제인간을 손쉽게 용도폐기하는 인간의 추악한 심성위에 비수처럼 내려꽂힌다.
2029년 같은 도시에서 시작하는 영화 ‘터미네이터2’(감독 제임스 카메론)에는 각각 선과 악을 대변하는 사이보그들이 등장한다.
핵전쟁으로 폐허가 된 뒤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시작된 미래의 도시. 기계를 조종하는 스카이넷은 인간 반란군의 지도자를 없애기 위해, 반란군은 이를 막기 위해 각각 사이보그를 과거로 보낸다.
악의 편에 선 사이보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는 악몽같은 존재인 반면 선의 편인 터미네이터는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도덕적 품격까지 갖추고 있다.
‘블레이드 러너’와 ‘터미네이터2’에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쪽은 복제인간과 터미네이터였다. 복제인간은 자신을 쫓던 인간을 손아귀에 넣고도 목숨을 살려준다. 터미네이터는 재앙의 화근인 컴퓨터 칩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 두 영화가 보여주는 21세기는 어둡다. 기술이 사회의 발전을 뒷받침한다는 신뢰에 의문을 던진다. 복제인간까지 만들어내는 테크놀러지의 진보가 과연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 이미 창조자의 영역에 도전한 우리 앞에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김희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