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환상 속으로 숨고 싶은가? 가파른 현실을 꿈속에서나마 잊고 싶은가?
당신을 ‘이강백 연극제’에 초대한다. 그러나 현실을 잊게해 줄 아편같은 꿈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오히려 환상이나 알레고리(우의·寓意) 속에 현실보다 더 번뜩이는 칼날이 숨어있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시길….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비사실주의적인 작풍으로 현실문제에 깊숙이 개입해온 이강백. 그의 대표작 4편을 내로라하는 연출가 4명이 번갈아 무대에 올린다. 예술의전당이 격년으로 기획하는 ‘오늘의 작가전’에 오태석 최인훈에 이어 세번째 인물로 이강백이 초대된 것.
이번 연극제를 바라보는 무대 안팎의 눈빛들은 호기심으로 번뜩인다. 이강백이 제공한 날재료들을 소문난 숙수(熟手)인 4명의 연출자와 4개 극단이 어떻게 다듬고 데치고 볶고 튀겨 맛을 낼까.
이강백의 희곡은 김아라(74년작 ‘내마’) 정진수(82년작 ‘쥬라기의 사람들’) 채윤일(95년작 ‘영월행일기’) 이윤택(98년작 ‘느낌, 극락같은’)의 손에 들리면 ‘그들의 것’으로 재탄생될 뿐이다.
대장정의 첫 작품은 16일 막이 오르는 ‘내마’. 유신정부로부터 ‘상연금지’판정을 받았던 불온한 연극. 극내용이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등의 구구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무대는 당시 현실과는 너무 먼 통일 이전의 신라. 전임 마립간이 죽자 귀족들은 새 마립간으로 ‘눌지’(전진기)를 추대하지만 ‘강대국’ 대사는 23년전 인질로 잡아갔던 ‘실성’(이남희)을 데려와 강제로 왕위에 앉힌다.
‘실성’은 폭군이 된다.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쾌감 때문이 아니라 그 절대권력이 외로워서다. 그가 얻고 싶은 유일한 위로는 젊은 역사기록관 ‘내마’(박상종)로부터 “나 역시 당신처럼 외롭습니다”라는 고백을 듣는 것.
그러나 ‘내마’는 ‘실성’이 고문에 가까운 기행으로 괴롭혀도 대나무처럼 꼿꼿하다.
“저는 역사의 정당한 섭리를 믿습니다. 가끔은 숨겨지기도 하고 때로는 오해되기도 합니다만 그 올바른 섭리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켜 나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마’는 ‘역사의 섭리’로부터 배반당한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실성’을 시해하고 한쪽 팔을 잃었지만 결국 자신의 ‘의거’가 또다른 절대권력을 낳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
정의의 실패냐고? 담합한 귀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내마’가 마지막 순간 내뱉는 말은 “억울하다”가 아니다.
“저 역시… 외롭습니다.”
연출가 김아라는 초연 24년만에 ‘내마’를 무대에 다시 올리며 한편의 현대음악극처럼 재창조했다. 고음과 저음으로 화음을 이루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대사톤, 배우들의 육성으로 만들어낸 효과음 등은 극을 관객의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스미게 한다.
울울한 갈대울음처럼 “내마 내마…”를 안타까이 부르는 목소리는 묻는다.
“당신은 외롭지 않아?”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