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선 결과가 나온지 일주일쯤 지난 12월26일. 정세영(鄭世永)현대그룹회장이 여의도 민자당사로 김영삼(金泳三)대통령당선자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주 주 주 죽을 죄를 졌습니다.”
말솜씨가 있다는 평을 들어온 그였지만 이날은 심하게 더듬거렸다.
“형님(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을 지칭) 고집이 워낙 세서… 온 집안이 (정계진출을) 반대했는데도… 그리 됐습니다…부디 용서하십시오.”
“기업인은 기업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김당선자는 단 한마디 하고는 말을 끝냈다. 민자당사를 나서는 정세영씨 어깨가 축 늘어졌다. 정부의 ‘현대 조르기’와 현대그룹과 정주영씨의 ‘기약없는 잠행(潛行)’은 이렇게 시작됐다.
96년초 홍인길(洪仁吉)청와대총무수석은 전대주(田大洲)전경련전무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대그룹 참 대단합디다. 그렇게 밟았는데 멀쩡하잖아요.”
전씨는 이 말에서 김대통령이 정씨에게 가진 구원(舊怨)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현대 계열사 하나쯤 부도나는 꼴을 기대한 것 같더라는 것.
사냥이 시작됐다. 정주영씨는 물론 정몽헌(鄭夢憲)현대상선부회장 박세용(朴世勇)현대상선사장 엄용기(嚴龍基)현대종합목재사장 이병규(李丙圭)후보특보 등 20여명이 구속됐으며 입건된 사람은 1백명이 넘었다.
정주영씨는 10일 발간한 그의 두번째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이렇게 울분을 토로했다.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더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소도 말도 웃을 후진국적 정치폭력이 백주에 횡행했던 지난 시절이 어이없을 뿐이다.”
심현영(沈鉉榮·현 청구부회장)전현대그룹종합기획실장은 “남들은 교실에서 ‘신경제’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우리만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현대그룹에 대한 경제제재의 유형은 크게 세가지. △산업은행 등의 설비자금 대출중단 △해외주식예탁증서(DR)발행불허 △기업공개와 장외시장등록 불허가 그것이다. 제재수단은 금융부문에 집중돼 있었다. 제재주체는 재무부.
움츠린 현대가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리도 만무하니 산업정책으로는 크게 괴롭힐 것이 없다. 세법(稅法)이나 공정거래법으로 다스리면 너무 표시가 난다. 반면 금융제재는 밖으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조이는 고통은 세다는 특징이 있다. 속으로 골병드는 것이다. 시중은행 여신담당임원의 분석.
“금융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는 사람이 현대 제재를 기획한 것이 분명합니다.”
현대는 산업은행에 △92년 6천5백23억원 △93년 8천3백67억원 △94년 1조5천4백10억원의 시설자금대출을 신청했으나 한푼도 받지못했다. 설비투자를 못하면서 현대그룹은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산업은행 실무자의 고백.
“현대가 자금신청서를 내려 하면 ‘요즘 분위기를 모르느냐’며 먼저 딴전을 피웠습니다. 신청서가 접수되면 대출 안해줄 명분을 찾아야 되니 피차 피곤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93년5월 안기부는 이런 정보보고를 올렸다.
“장기신용은행의 봉종현(奉鍾顯)행장이 현대 대출여부를 놓고 고민하다가 서울고 후배인 김영수(金榮秀)청와대민정수석을 만남. 김수석이 ‘때가 이른 것 같다’는 의견을 보여 대출이 무산됨.”
조흥은행은 현대자동차써비스의 수익권담보대출 신청을 받고 돈을 내줬다. 신탁계정에 예금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나가는 대출이었기 때문. 그러나 은행감독원은 ‘대출의 경위와 이유’를 따지고 들었다. 대출은 즉각 회수됐다.
은행돈을 못쓰게 되자 현대는 현대중공업 등 5개사의 기업공개와 장외등록을 추진했다. 현대자동차의 DR발행도 시도했다.
그러나 증권감독원은 “대규모 주식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증시에 악영향을 미친다”며 불허했다. 증권감독원 당시 실무자의 증언.
“현대그룹이 증자를 신청하면 기준을 변경했습니다. 부적격 판정을 받게끔 허가기준을 강화한 거죠.”
은행감독원은 94년 10월 국정감사때 30대 계열의 여신현황자료를 제출했다. 의외로 현대의 여신이 소폭 늘어난 것으로 집계돼 있었다. 당연히 눈길을 끌었다.
“누가 이런 자료를 냈나. 정신이 있나 없나.”
홍재형(洪在馨)재무장관의 불호령이 떨어졌고 국감자료는 회수됐다.
그러나 정작 김대통령이 내놓고 ‘현대그룹을 죽이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홍재무장관 등의 일관된 증언.
김영수전민정수석은 “김대통령은 재임기간에 절대 현대를 거론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감(私感)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회고했다. 이경식(李經植)전부총리의 설명.
“아랫사람들이 받들어 (제재를) 한 겁니다. 대통령의 심기를 미리 읽은 거죠. 김대통령은 개별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현대제재는 김대통령의 이른바 ‘분위기 통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정부는 제재 당시나 해금 후 일관되게 “현대 제재란 없다”고 강변했다. 그러다보니 해금을 연상케 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선문답식 대화가 오갔다.
“제재가 풀리는 것입니까.”
“현대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제재하려고 그래요?”
“지금까지 제재한 일이 없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현대 제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경제관료라면 누구나 동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금을 건의했다.
93년7월 이부총리의 정례 대통령 독대. 이부총리가 당시 노사분규로 홍역을 치른 현대자동차 이야기를 꺼냈다.
“각하, 5∼10년 후 일본을 능가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산업은 자동차입니다. 한국에서 선두주자는 현대자동차입니다. 노사안정도 중요하지만 과감한 기술투자가 필요합니다. 투자를 못하면 산업발전에 지장이 옵니다.”
현대그룹에 대한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 개별산업의 경쟁력을 화제로 꺼낸 것. 그때마다 김대통령은 “그래야지”하고 말했지만 그뿐이었다.
답답해진 이부총리는 홍재무장관에게 당부했다.
“홍장관, 현대에 관해 각하께 두어번 진언했지만 대통령의 태도에 변화가 없소. 당신도 기회될 때 건의해주시오.”
당시 재무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홍장관도 이미 품속에 ‘현대 해금의 필요성’이라는 한 장짜리 건의자료를 항상 넣고 다녔다. 대통령의 표정이 풀리는 기색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놓기 위해서였다.
현대도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대 고위 관계자의 설명.
“청와대에다 여러차례 화해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해금을 청할 명분이 필요하니 현대가 먼저 가시적인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94년5월 갑작스레 나온 정주영씨의 경영일선 퇴진선언과 일본출국은 이같은 몸짓이었다.
그러나 정명예회장 출국 이후에도 해금 조짐은 없었다. 부하직원의 건의에 마지못해 출국한 정명예회장은 일주일 뒤 어정쩡한 모습으로 귀국한다.
문민정부 출범 후 2년 이상을 끌던 현대 문제는 한이헌(韓利憲)씨가 청와대경제수석이 되면서 급진전한다.
95년1월 한경제수석은 김대통령에게 아주 엉뚱한 방법으로 현대 얘기를 꺼냈다. 이미 삼성에 자동차사업진출을 허용한 뒤였다.
“각하, 세간에 각하와 관련해 괴소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게 뭐요?”
“청와대가 현대에 시설자금을 못주게 막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각하께서 한 번이라도 그런 지시를 내린 일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래?”
김대통령이 ‘스스로 취한 조치를 번복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한수석은 에둘러 얘기를 풀어나간 것이었다.
“각하, 퇴임시에는 무엇보다 경제가 좋아야 합니다. 경쟁력있는 첨단제품을 많이 만들어 팔아야 하지요. 그러려면 지금 좋은 공장을 지어야 합니다. 현대가 공장을 짓겠다는데 차질이 생기면 안됩니다. 국경없는 경쟁이 이뤄지는 ‘세계화’ 시대 아닙니까.”
새로운 국정지표로 설정된 세계화까지 거론되자 김대통령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는 제가 풀겠습니다.”
“알았어.”
한수석은 쾌재를 부르며 오랜 친구로 통합 재경원의 차관인 이석채(李錫采)씨에게 전화했다.
“어이, 이차관. 현대를 제재하든 말든 너희들(재경원)이 알아서 해. 절대로 우리(청와대) 핑계 대면 안돼.”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청와대는 현대 제재 같은 거 안한단 말야.”
이차관은 이 말을 즉시 알아들었다.
그렇다고 ‘현대 제재란 없다’고 줄곧 강변해온 정부가 현대에다 ‘금융제재 풀어줄테니 뭐 한 건 신청해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그럭저럭 3월이 됐다.
95년3월 현대자동차가 또 한번 해외 DR발행을 허용해달라고 재경원을 졸랐다. 실무자의 대답은 ‘한번 신청해보라’ 였다. 깜짝 놀란 현대는 즉각 DR를 신청했고 전 언론은 ‘현대 금융제재 해금’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산업은행 시설자금 대출도 곧 재개됐다.
대선때 “돈으로 권력을 사려는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호언한 김대통령은 정주영씨뿐만 아니라 기업체 현대그룹에 대한 제재까지 2년 이상 묵인 방조했다. 현대 제재 역시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경제정책을 왜곡한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허승호·이강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