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절대 개방되면 안됩니다. 저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대통령 직을 걸고…(잠시 멈춤)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것입니다.”
14대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이틀째인 92년 11월23일 김영삼(金泳三)민자당대통령후보의 경기 용인 유세에서 나온 현장공약이다. 김후보가 ‘직을 걸고’라는 말 다음에 잠시 멈추자 청중들은 쌀시장 수호의 단호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김후보는 ‘순간 간이 철렁 떨어져서’ 말문이 막힌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다음 유세장인 이천으로 이동하는 선거운동 전용버스 안. 버스에 타자마자 김후보는 이경재(李敬在)공보특보와 한이헌(韓利憲)경제특보를 불러 노발대발했다.
“연설문 누가 썼노? 누가 ‘직을 걸고’란 말을 썼느냐 말이야! 당장 찾아내.”
연설문 초고는 전날밤 전병민(田炳旼)특보가 썼다. 경기도 일대가 재야 농민단체의 활동이 활발한 곳임을 감안해 마련한 초강성 공약이었던 것. 차마 집필자를 밝히지 못한 이들은 그저 머리만 조아렸다.
“저희들이 그 대목을 찾아 삭제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생각을 해봐라. 대통령 될 사람이 누고? 내 아이가. 내가 야당 후보들처럼 무책임한 사람이 되란 말이야. 금방 거짓말이 될텐데 우째 할래.”
보좌진이 부랴부랴 언론사에 ‘후보의 뜻과는 다른 실수’라고 해명하며 보도삭제를 요청했으나 이미 석간신문이 제작을 마친 시간이었다.
오후의 이천 하남 유세에서는 “쌀은 어떤 개방압력이 오더라도 절대 수입해서는 안된다”는 원칙론을 밝히는 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다시는 ‘직을 걸고’란 표현은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국민은 ‘YS의 쌀 공약’하면 ‘직을 걸고’ 발언만 기억했다.‘YS와 쌀의 악연(惡緣)’은 이렇게 시작됐다.
두달쯤 후인 93년 2월초 서울 하얏트호텔.
김당선자가 허신행(許信行)농촌경제연구원장을 저녁식사에 초대, 농림수산부장관 입각을 요청하는 자리였다.
식사가 끝날 때쯤 김당선자는 마지막 당부를 했다.
“무엇보다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을 잘해야 합니다. 특히 쌀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도 우리 농업의 큰 고비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대통령은 그후 UR타결 막바지까지 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다른 고위공직자들도 쌀개방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태도였다. ‘직을 걸고’라는 대통령의 약속이 너무 큰 부담이었을까.
어쨌거나 그해 여름까지 UR협상은 지지부진했고 전망도 불투명했다.
▼ 『쌀개방하면 農政 끝장』 ▼
쌀문제는 수면아래 잠복한 채 93년10월을 맞았다.
10월14일 깜짝 놀랄 소식이 터졌다.
‘일본 쌀시장 개방’ 제하에 ‘일본이 10월초 미국과의 비밀협상에서 쌀을 6년간 유예 조건으로 개방키로 합의했다’는 기사가 본보 1면머리에 특종으로 보도된 것. 쌀개방과 관련해서는 일본이 방파제 역할을 하는 바람에 그 덕을 보아온 우리 입장에선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음날 아사히 등 일본 신문들이 자국정부로부터 사실을 확인, 일제히 1면머리로 기사를 받았다. 쌀문제는 UR타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만큼 AP AFP 로이터 등 세계 주요 통신사들도 이를 긴급타전했다.
이경식(李經植)전부총리의 회고.
“쌀시장 개방저지의 최후보루가 무너졌음을 직감했습니다. 주미 대사관에 교차확인을 지시, 25일 최종 확인됐습니다. 26일 독대 때 대통령에게 그 내용을 보고한 뒤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할 때가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김대통령은 처음 얘기를 듣는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사실이오? 11월중순 내한할 호소카와총리(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일본총리)에게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겠소.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각하, 쌀에 관한 한 우리 입장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일본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미국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전면개방 10년 유예, 최소시장접근 3%’까지는 양해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구체적인 방안은 허신행농림수산장관이 마련해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날인 27일 이부총리는 허장관을 불러 협상방안을 작성해 대통령께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허장관의 안색이 변했다.
“쌀을 개방하라고요? 그러면 농정은 끝입니다.”
“허장관, 반드시 쌀을 개방하자는 것이 아니오. 일본이 무너진 마당이니 최악의 경우를 미리 대비하자는 말이오.”
허장관은 힘없이 방을 나갔다. 허장관은 끝내 그 보고를 대통령에게 하지 못했다.
악연은 점층법(漸層法)처럼 쌓이는 법. 한달쯤 뒤 YS는 쌀과 가장 치명적인 인연을 맺는다.
11월23일 미국 백악관 접견실. 시애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김대통령은 APEC가 끝난 후 백악관을 방문했다. 박관용(朴寬用)전비서실장의 증언.
양 정상의 화제는 주로 북한 핵 관련 공조문제에 집중됐다. 우리측에서 의제를 ‘외교문제’에 국한하자고 당부해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담이 끝날 무렵 빌 클린턴대통령이 UR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고 넘어갔다. 클린턴대통령측 통역관인 토니 킴(한국명 김동현·교포2세)이 통역했다.
“UR협상을 금년내로 타결할 수 있도록 협조해주십시오. 쇠고기 금융 통신 등 부문에서 한국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양국이 긴밀히 협의해 UR를 성공적으로 타결시킵시다.”
쌀에 대해 언급이 없자 김대통령이 흔쾌하게 대답했다. 클린턴도 기뻐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귀국 다음날인 26일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야당이 ‘한미 정상회담 도중에 클린턴대통령과 쌀 개방에 대한 비밀협약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씰데 없는 소리….”
김대통령은 코웃음쳤다.
이 시간 박비서실장도 언론보도에 깜짝 놀랐다.
그는 한 술 더 떠 미국의 일부 신문에도 ‘쌀 등과 관련해 한미간 협조키로 했다’는 보도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박실장은 급히 정상회담에 배석한 정종욱(鄭鍾旭)외교안보수석과 박재윤(朴在潤)경제수석을 불러 물었다.
“회담도중 쌀 얘기는 없지 않았소?”
“사실은 클린턴대통령이 ‘라이스(쌀)’라고 언급했는데 통역관이 쌀 부문만 빼고 통역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말이었다.
“뭐라고? 그러면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나 나에게 얘기를 해야지. 당신들 도대체 뭣하려고 미국까지 따라갔소.”
박실장은 즉시 대통령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대통령도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각하, 고정하시고 수습할 방도를 찾아야….”
“어떻게 수습하노. 나보고 거짓말을 하란 말이야?”
“거짓말을 할 수야 없지요. 그렇지만 각하께서 쌀개방을 약속해준 일은 없잖습니까. 초점을 ‘밀약’에 맞추고 밀약은 없었다고만 말씀하십시오.”
“우째 이런 일이….”
▼ 주눅든 측근들 아예 함구 ▼
이날 대통령은 3부 요인 및 야당대표를 청와대로 초청, 점심을 함께 하며 방미 성과를 설명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쌀개방과 관련한 어떤 합의사항도 없었습니다.”
허농림수산장관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은날 국회에서 “지금 이 시점까지 정부는 쌀 시장의 개방을 전혀 검토한 일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대통령이 쌀문제와 다시 한번 마주친 것은 12월1일 UR대책보고 때였다. UR에 대한 정부의 대응책을 최종보고하는 자리로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이 참석했다.
사실은 대통령이 쌀 문제를 놓고 각료들과 진지하게 논의한 ‘첫자리’였다. 10월26일 이부총리의 간단한 보고 이후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상황을 제대로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하, 쌀시장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일본식 개방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만일 개방유예기간을 6∼10년 얻어내고 그 기간중에는 3% 정도의 시장접근만 허용한다면 우리 농민이나 농업에 주는 타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습니다.”
강봉균(康奉均·현 청와대정책기획수석)대외경제정책조정실장의 자세한 보고에 김대통령은 매우 기뻐했다. 체증이 확 뚫리는 듯 했던 것.
이전부총리는 “측근들이 쌀문제를 금기로 생각하며 대통령에게 정확한 조언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혼자 걱정만 많이 했을 뿐 정작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깊이있는 정책검토를 할 기회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강전실장도 “그때까지 대통령은 여러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용감하고 솔직한 사람이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실만 정확하게 알려주면 무서운 결단력으로 돌파하는 분이다”고 회고했다.
UR협상결과 쌀빗장은 풀렸고 12월9일 김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담화를 발표했다. 담화제목은 ‘고립을 택할 것인가,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면서 국민 여러분 앞에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대통령 재임중 있은 다섯번의 사과담화 중 첫번째 것이었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