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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41]쌀 개방-피말리는 막후협상

입력 | 1998-04-19 19:25:00


93년 12월9일 스위스 제네바의 관세무역 일반협정 본부.

마당 한쪽에 김영진(金泳鎭·평민당) 조일현(曺馹鉉·국민당)의원이 자리를 깔고 앉았다.서울에서 가져간 가방에서 전기이발기와 태극기,플래카드를 주섬주섬 꺼냈다. 김의원 앞섶에 흰 천이 드리워졌다.

쌀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로 삭발을 하려는 것이었다.

전기콘센트가 없어 이발기는 쓸 수 없게 되자 잠시 후 가위가 등장했다. 먼저 조의원이 김의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다음은 조의원 차례.

유럽의 ‘토마토시위’만 보아온 서양기자들의 눈에는 깜짝 놀랄 이벤트였다. 왁자지껄하게 카메라맨이 모여들고 플래시가 터지며 난리가 났다.

정문에 있던 경비원들이 뒤늦게 조의원의 양팔을 붙잡고 끌고나갔다. 혼자 남은 김의원은 “조의원을 놔달라”며 경비원 팔에 매달린 채 같이 끌려나갔다.

만3년전인90년11월 농어민후계자 이경해(李京海·현 전북도의회의원)씨가 쌀개방저지를 주장하며 GATT본부 복도에서 결행한 할복을 연상케하는 사건이었다.

이틀 뒤인 12월11일.

농협(農協) 시위대 10여명이 GATT 정문에 도착했다. 머리를 미리 밀어버린 이들은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쌀개방 결사반대.’

붉은 핏방울이 백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섬뜩했다. 이 광경 역시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중계됐다. 사건이 이어지기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경식(李經植)부총리가 쌀개방을 처음 시사한 다음날인 12월5일 국회 예결위원회에 출석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마자 의석에 있던 김종완(金鍾完·평민당)의원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 「매국노」소리에 울분 토해 ▼

“이 매국노! 쌀빗장을 열어줘? 이완용 같은 놈.”

동료의원들의 제지로 멱살잡이는 가까스로 피했다. 그날 저녁 이부총리는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나는 곧 부총리 그만둬. 두고봐. 민간인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그 사람 만나면 두들겨패주고 말거야!”

이틀 뒤인 12월7일.

농민 3만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쌀개방 반대시위를 벌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최대 규모였던 이날 시위에서는 ‘김영삼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당시는 문민정부의 개혁에 대한 지지도가 90%를 오르내리던 때였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직을 걸고’ 막기로 약속한 쌀시장 개방이었던 만큼 빗장이 풀리기까지 숱한 사연과 갈등, 곡절이 있었다.

허신행(許信行)전농림수산부장관은 “전 국민의 결사적인 쌀개방 반대 정서는 협상담당자에게 다소 부담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은 우리의 협상력을 강화한 측면이 크다”고 평가했다.

정부내에서의 갈등도 만만찮았다.

93년 10월 하순부터 이부총리는 허장관에게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본격화한 만큼 쌀협상 방안을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보고하라”고 수차례 당부했지만 허장관은 끝내 이를 피했다.

이부총리의 생각은 이랬다.

“쌀문제는 김대통령이 고독한 결단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11월23일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결판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 본인이 확고한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농림수산장관의 보고가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허장관의 생각은 달랐다.

“현실적인 협상전략이라고는 일본식 개방(수년간 관세화유예, 일정비율 최소시장접근)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 협상안’이란 ‘쌀개방 건의’와 동의어다. 쌀과 관련해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결연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부총리는 이 문제로 청와대 비서실과도 맞섰다.

청와대팀이 중심이 된 ‘대통령 방미 대책반’에서는 방미시 쌀은 일절 거론치 않기로 했다. 이부총리 등 경제기획원 팀의 눈에는 ‘국익을 포기하고 대통령을 속이는 일’이었지만 비서실의 견해는 ‘지금은 쌀을 거론하면 손해’라는 것이었다.

12월2일 협상단이 제네바로 떠났다. 허장관이 보고해 왔다.

“4일마이크에스피미 농무장관과 두차례담판함.‘10년유예,유예기간중최소시장접근1∼4%허용’조건을 확보했음.”

본국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성과였다. 그러나 지휘부의 이부총리와 박재윤(朴在潤)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은 또 한번 마찰을 빚었다.

박수석이 ‘유예기간의 전반 5년 동안 최소시장 접근을 없애 김대통령 재임중에는 쌀이 한 톨도 수입되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편 것.

이부총리는 “웃음거리만 될 요구”라며 “9년 뒤 개방여부를 재협상한다는 조건을 추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황인성(黃寅性)총리가 박수석 편을 들었다. 이부총리는 어쩔 수 없이 허장관에게 새로운 훈령을 내렸다. ‘고생했다. 어떤 경우에도 협상이 깨지거나 이미 확보한 성과를 잃지 않도록 하라’는 신신당부와 함께.

허장관은 5일 에스피장관과 다시 만나 새로운 요구를 꺼냈지만 면박만 당했다.

그러나 쌀개방 반대에 가장 적극적이던 시민단체는 오히려 정부입장을 쉽게 이해했다. 경실련이 이부총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12월6일 저녁 신라호텔. 서경석(徐京錫)목사 김성훈(金成勳·현 농림부장관)중앙대교수 농민대표 등 4명이 이부총리에게 ‘개방을 시사한 이유를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끝까지 반대하면 두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GATT를 탈퇴하느냐, 일본 수준을 감내하느냐입니다. 나는 미국 등과 적극교섭해 일본보다 나은 조건을 따내는 길을 택했습니다.”

“차라리 국별 양허란을 빈칸으로 비워 결과적으로 일본수준을 얻는 것이 욕을 덜 먹지 않겠습니까?”

“욕을 먹더라도 국익부터 챙겨야지요.”

쌀개방반대 범국민대책위 대표였던 김교수 등은 이미 쌀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던 터라 정부의 고충을 오히려 쉽게 납득한 것. 고수(高手)끼리는 통하는 법일까.

또 하나의 숨겨진 일화.

한국의 쌀협상에는 일본 정부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93년 11월26일 도쿄(東京)의 농림수산성.

김광희(金光熙)농림수산부차관보가 시와쿠 일본농림수산성심의관(차관급)에게 말했다.

“미일 협상내용은 들었습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관세화의 예외를 인정받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잘만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협상의 적기는 미―유럽연합(EU)간 주요쟁점이 해소되고 4자회담(미국 EU 일본 캐나다)이 시작되기 직전인 11월29일에서 12월6일 사이가 될 것입니다.”

“왜지요?”

“미일협상 내용이 다자(多者)테이블에서 공식화하면 한국은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전에 큰 떡을 쥔 미국이 시간에 쫓길 시점을 잡아 타결해야 해요. 목을 지키세요.”

“….”

“미일협상 타결 후 일본은 EU와 농산물수출국을 설득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막판협상 방식을 택하면 시간에 쫓긴 미국이 대신 설득해주는 부수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이 ‘6년 유예, 3∼5% 최소시장접근’에 합의한 것에 비춰 당초 ‘8년 유예, 3∼5% 접근’을 최종 양보카드로 준비했다. 타결결과는 ‘10년 유예, 1∼4% 접근,9년 후 재협상’이었다.

유례없이 좋은 조건이 공개되자 각국은 깜짝 놀랐다. 허신행씨는 “시와쿠심의관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으며 좋은 결과를 낳은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고 회고했다.

협상대표단은 귀국 다음날인 12월18일 청와대 조찬에 초청됐다. 김대통령은 9일의 대국민 사과담화 일은 잊어버린 듯 일일이 손을 잡아가며 치하했다.

“수고했소. 정말 수고 많았소.”

그러나 12월21일 쌀개방 책임을 묻는 개각으로 황총리 이부총리 한승주(韓昇洲)외무 허농림수산장관은 물러났다.

개각 1주일쯤 후 김대통령은 이전부총리를 불러 칼국수 점심을 냈다. 다시 일주일 뒤에는 허전장관을 불렀다.

“미안해. 태풍이 오는데 우짜노?”

김대통령은 그후 이전부총리를 한국은행 총재에, 허전장관을 소비자보호원장에 각각 임명해 신세를 갚았다.

〈허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