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3월 청와대와 집권 민주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현철(賢哲)씨를 ‘저팔계’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현철씨를 ‘서유기(西遊記)’의 저팔계에 비유한 것. 굳이 그 뜻을 풀이하자면 ‘자기 성정을 못이기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저팔계’란 말이 나돌게 된 사연은 이랬다.
97년 3월12일.
김대통령이 고심 끝에 이회창(李會昌)전총리를 신한국당 대표로 결정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현철씨는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한보비리사건으로 발이 묶여 있던 현철씨로서는 별달리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서울 구기동 집에서 양주병을 집어드는 길 외에는….
허탈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현철씨는 급기야 앞에 놓인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후배들도 여러명 함께 있었지만 미처 말릴 수도 없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민주계 핵심인사의 설명.
“현철씨 집에서 난리가 났던 모양입니다. 탁자 유리를 치는 바람에 손등에서는 피가 흐르고…. 이회창씨에게 정권이 넘어가면 (김대통령이나 자기나) 모두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겠죠.”
▼ 국정전반 영향력 막강
다음날 친구이자 측근인 박태중(朴泰重)씨와 함께 신한국당 최형우(崔炯佑)의원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중이던 서울대병원을 찾아간 현철씨의 손등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전날 있었던 소동의 격렬함을 암시하는 흔적이었다.
사실 이전총리가 신한국당 대표에 기용된 것은 현철씨로서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좌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후 ‘어른(현철씨는 밖에서는 아버지인 김전대통령을 이렇게 호칭했다)’과 만날 기회조차 없어졌으니 손등의 상처는 한마디로 ‘좌절의 표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통령은 한보비리사건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한 뒤 취임 4주년을 맞는 2월25일 대국민 담화에서 자식과의 관계를 ‘공식정리’했다.
“국민 여러분. 지금 나라 전체가 한보사건으로 인한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중략) 저를 더욱 괴롭고 민망하게 하는 것은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제 자식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여부에 앞서 그러한 소문이 돌고 있는 사실 자체가 저에게는 크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중략) 제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일체의 사회활동을 중단하는 등 근신토록 하고 제 가까이에 두지 않음으로써 다시는 국민에게 근심을 끼쳐드리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김대통령이 비통한 표정으로 “자식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토로하자 시중에서는 갖가지 말이 회자됐다.
김대통령의 담화는 또 ‘전근대적(前近代的) 국가운영에 대한 자기고백’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대통령의 아들이 ‘소통령’ ‘부통령’으로 불리며 국정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한국적 정치문화 자체가 ‘전근대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의 집권 기간중 현철씨의 국정전반에 걸친 막강한 영향력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과 지근(至近)거리를 유지할 수 있던 부자지간이라는 특수관계, 사실상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현철씨에 대한 김대통령의 지극한 편애(偏愛), 청와대 안기부 등 권부(權府)내에 포진해있던 ‘현철 맨’들의 보호막, 현철씨 자신의 강렬하고도 집요했던 정치를 향한 욕구, 그리고 한국사회의 ‘줄대기 문화’ 등 많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김대통령이 87년 대선에서 실패한 직후부터 현철씨는 아버지의 ‘1급 참모’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철씨와 비슷한 또래인 민주계 소장파의 설명.
“사실 김대통령은 87년 대선이 끝난 뒤 두 가지를 패인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여론조사를 이용한 ‘과학적 선거’에서 졌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홍보전에서 패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철씨가 여론조사기관인 중앙조사연구소를 만든 것은 바로 87년 대선 직후였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솔직히 말해 민주계는 여론조사의 중요성에 대해 잘 몰랐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철씨의 중앙조사연구소가 이듬해 총선에서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 예측이 맞아떨어지자 김대통령은 참모로서의 현철씨에 대해 결정적으로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던 겁니다.”
1급 참모로서의 차남에 대한 아버지의 신뢰는 김대통령 특유의 ‘보안스타일’ 때문에 날이 갈수록 더욱 굳어졌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참모’였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특히 인사문제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특1급 참모’였던 셈이다.
한때 ‘현철 인맥’으로 알려졌으나 김대통령에게 몇차례에 걸쳐 현철씨의 해외유학을 건의했던 문민정부 초기 인사 중 한사람은 이를 ‘김현철의 아버지정치’라는 말로 요약했다.
한마디로 현철씨의 영향력은 대통령인 아버지를 등에 업고 그 영향력의 행사가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초기 인사의 설명.
“많은 사람이 현철씨의 영향력을 김대통령에 대한 현철씨의 영향력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과 좀 다릅니다. 현철씨는 이를테면 대통령인 아버지에게서 사전에 정보를 빼내 그걸로 영향력을 행사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청와대 민정수석이나 정무수석실 안기부 등에 있는 측근들에게서 미리 인사나 정책정보를 입수한 뒤 대통령에 앞서 관련자들에게 ‘관심’과 ‘생색’을 표시하는 식이었죠. 생각해 보십시오. 청와대에 있는 측근들에게서 장관 후보로 올라가는 3배수 명단을 미리 받아 자기가 직접 그들을 접촉합니다. 물론 기용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만나는 거죠. 그 중에 한명은 결국 기용될 것 아닙니까. 현철씨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식이었던 겁니다.”
‘김소장과 부나방들’의 얘기가 시중에 나돌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현철씨의 영향력은 청와대와 안기부 등 권부 내에 ‘현철 인맥’이 막강하게 포진하면서 급속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안기부의 김기섭(金己燮)기획조정실장,청와대 민정수석실의 김무성(金武星) 이충범(李忠範)비서관 등은 대표적인 ‘현철 사람들’.
하지만 문민정부 출범 직전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민정부 출범 직전 김대통령당선자의 밀명(密命)을 받고 조각(組閣)인선 실무작업을 맡았던 전병민(田炳旼)씨의 기억.
“조각인선을 할 때만 해도 현철씨의 처신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인선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세번인가 만났는데 어떤 사람들의 이력서를 들고와 ‘선거 때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도운 사람입니다.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그러나 절대 부담은 갖지 마십시오’라며 부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인사개입이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 『YS, 아들행동 용인』
문민정부 초기 2년 동안 정무비서관을 지낸 김충남(金忠男)박사의 증언.
“김대통령 취임 직후였습니다. 하루는 안기부장 비서실에 있는 모 직원에게 ‘요즘 부장이 보고는 제대로 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직원 얘기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장이 보고를 해도 대통령은 ‘음 그건 알고 있고…’라며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지시하기 일쑤라는 겁니다. 중요한 내용은 아들한테 이미 들어 알고 있다는 거죠.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몇 차례 그런 과정이 되풀이되다 보면 김대통령도 현철씨가 안기부 보고나 청와대 내부보고를 미리 입수해 자기한테 얘기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김대통령은 아들의 그런 행동을 용인했습니다.”
문민정부에 ‘피니시 블로(결정타)’를 날린 한보그룹 정태수(鄭泰守)총회장의 아들 정보근(鄭譜根)한보회장의 경우.
김대통령 취임 직후인 93년4월. 김무성청와대 민정비서관은 재계에서 생산된 ‘정보지’를 읽다가 ‘한보의 정보근회장과 박대근상무가 김현철씨와 서석재(徐錫宰)의원을 팔고 다닌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보철강의 당진제철소 투자를 이상하게 생각하던 김비서관은 순간 ‘한보는 위험한 회사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각 현철씨에게 확인전화를 걸었다. “정보근이라는 사람은 만나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혼을 좀 내주라”는 게 현철씨의 대답이었다.
김비서관은 직접 전화번호부에서 한보그룹 회장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김비서관은 정보근회장이 연결되자 대뜸 언성을 높였다.
“현철씨를 압니까. 만난 적은 있습니까. 왜 대통령의 아들을 팔고 다니는 거죠.”
당황한 정회장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자 김비서관은 “그렇다면 아마 박대근이라는 사람이 김현철씨를 팔고 다니는 모양인데 즉각 조치한 뒤 결과를 통보해주세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김현철 스토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창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