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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43]「小統領의 질주」와 견제 기도

입력 | 1998-04-23 19:43:00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시중에 나돌던 ‘김현철(金賢哲)과 부나방들’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현철씨의 권력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마냥 질주하기만 한 것일까.

문민정부 출범 직전 ‘문민개혁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조각(組閣)인선작업의 실무를 맡았던 전병민(田炳旼)씨의 기억은 김대통령이 당시 현철씨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집권 민자당이 ‘6·27’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직후인 95년7월.

전씨에게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대통령이 전씨를 청와대로 부른다는 연락이었다. 전씨가 한마디 내뱉었다.

“대통령에 취임하신 이후로 전화 한 통화 안하시더니 (지방선거에 참패하고) 급하니까 부르시는 겁니까.”

전씨는 그러나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김대통령과의 독대(獨對)를 준비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의 국정운영 전략과 96년 총선 및 대선전략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

▼ 여의도硏 보고서 큰 파문 ▼

하지만 1시간30분에 걸쳐 이뤄진 김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전씨가 강조한 것은 지방선거 참패 이후의 국정운영 전략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나중에 읽어 보십시오”라는 말로 보고를 줄인 전씨는 40분 이상을 ‘김현철 문제’에 할애했다. 작심하고 준비한 직언이었다.

전병민씨〓각하, 김소장(현철씨)한테 99명이 부탁이나 청탁을 들고 찾아온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부탁하러 오는 사람은 다 자기들이 아쉬워 찾아오는 겁니다. 각하, 그러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면 다 욕을 하고 돌아가게 돼있습니다. 그게 인간사 아닙니까. 김소장이 두세명의 부탁은 들어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머지 96명이나 97명은 돌아서서 욕할게 뻔하지 않습니까. 큰일 납니다. 김소장을 외국으로 내보내십시오. 국내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됩니다.

김대통령〓(입술을 깨무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두개 세개는 무슨…. 그 놈이 무슨 힘이 있다고 두개 세개 부탁을 들어준단 말이야.

김대통령이 입술을 깨물었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표시.

전씨가 면담을 마치고 성북동 집으로 돌아오자 현철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실장님, 어른(김대통령)하고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전씨는 그러나 “지방선거 얘기를 하다가 왔다”고만 말하고 말았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전씨가 김대통령에게 단순한 사견을 얘기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전씨의 설명.

“사실 김대통령이 들어오라고 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여론을 수렴했습니다. 요즘 무엇이 문제냐, 대통령한테 어떤 얘기를 하는게 좋겠느냐 등등 사전 여론청취 작업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소장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물론 나도 듣는 얘기가 있었지요. 그래서 김대통령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를테면 ‘김소장 문제’를 걱정하던 사람들의 ‘대리대사’격으로 말씀드린 겁니다.”

전씨가 지칭하는 ‘여러 사람’들이란 ‘비(非)현철씨 계열’의 민주계 인사들과 문민정부 초기 개혁세력을 자임했던 ‘동숭동팀’ 인사들뿐만 아니라 민정계 인사들까지를 포함한 것이었다.

사실 ‘6·27’지방선거 참패는 김대통령이 집권 후 맞닥뜨린 최초의 정치적 패배였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김현철 문제’가 정치권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전씨뿐만 아니었다. 많은 여권 인사들이 지방선거의 참패원인을 김대통령의 정국운영 스타일에서 찾았다.

야당에서 이슈로 부각시킨 김대통령의 ‘3독(獨)’, 즉 독선 독주 독단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여권인사들은 김대통령의 독선적 정국운영 스타일이 지방선거 참패의 배경이 됐고, 그런 스타일 뒤에는 ‘비선 조직’이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선조직이란 다름아닌 김현철의 사조직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방선거 직후인 95년 7월4일 민자당 사무총장에 기용된 김윤환(金潤煥)의원은 취임 직후 김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정치스타일 변화를 건의했다.

김의원이 말하는 김대통령의 정치스타일의 변화는 한마디로 사조직 정치, 다시 말해 현철씨가 국정운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김의원 측근의 설명.

“사실 김대통령과 김의원은 형님 아우 하는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김의원이 정치스타일을 문제삼은 것도 당시로서는 쉽지않은 일이었습니다. 김의원도 나름대로 ‘김현철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 대통령을 만나 나름대로 국정운영 방향과 시중여론을 전달하면 김대통령은 ‘내가 알기로는 그렇지 않던데…’라면서 집무실 서랍에서 다른 보고서를 꺼내곤 하더라는 겁니다. 누구 보고서이겠습니까. 사조직, 즉 현철씨가 만든 보고서 아니겠습니까.” 95년 7월31일 청와대에서 김대통령에게 지방선거 참패 이후의 민심수습방안을 건의하고 당사로 돌아온 김총장은 출입기자들이 “현철씨 문제도 거론했느냐”고 묻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현철씨 문제가 더이상 대통령의 아들 문제가 아니라 ‘국정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뜻이었고 김대통령에게 분명히 얘기했음을 뜻하는 간접화법이었다.

김총장이 김대통령에게 현철씨 문제의 해결을 건의하기 직전 민자당에서는 이른바 ‘여의도연구소 보고서파문’이 일어 ‘김현철 문제’는 이미 지방선거 이후 당정의 최대 현안으로 논란이 되고 있었다.

민자당 부설 여의도연구소 보고서는 지방선거 패배의 원인을 이렇게 요약했다.

‘첫째, 정책결정과정에서 공조직보다 사조직에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었고 둘째, 집권세력의 일방독주적 개혁추진에 대한 냉소주의가 확산되고 있고 셋째, 민주계의 지분확대라는 현상만 두드러져 보인다.’

보고서는 ‘사조직’을 공개거론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위 ‘여권 사조직’문제가 정치쟁점화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여의도연구소의 보고서는 김영삼정부 출범 후 최초의 공개적인 사조직 비판이었고 파문도 그만큼 컸다.

물론 지방선거 이전에도 현철씨에 대한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현철씨의 국정개입을 경고, 김영삼정부 내내 현철씨와 갈등과 상호견제 관계에 놓였던 민주계 핵심 김덕룡(金德龍)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가(家)’내에서도 우려는 커갔다.

대표적인 인물이 누나 혜영(惠英)씨의 남편인 이창해(李昌海)씨.

현철씨의 큰 매형인 이씨는 재미교포. 이씨는 92년 말 장인인 김대통령의 선거를 돕기 위해 귀국했다가 대선이 끝나자 현철씨에게 “이제 당선되셨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가 나서서는 안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현철씨는 그런 매형에 대해 ‘의심’만 품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친인척은 물론 민주계나 김대통령 주변인사들에 대한 현철씨의 ‘의심’과 ‘견제’는 유별났다는 것이 민주계 인사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현철씨의 그런 의심과 견제는 심지어 장인인 김웅세(金雄世)롯데월드사장과도 갈등을 빚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과 김사장을 모두 잘 아는 한 재계인사의 설명.

“김대통령이 취임하고 한 2년 동안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김사장도 사위와 관련된 여러가지 얘기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김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이 행여 현철씨에 관해 좋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2년쯤 후에는 ‘현철이가 나를 모함한다’며 펄쩍뛰곤 하는 겁니다. 특히 95년 여름인가 청남대에 다녀오고 나서는 ‘망신당했다’며 어이없어 했습니다. 사위와의 관계도 불편하고 해서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대통령이 오라고 해서 갔는데 현철씨가 ‘장인어른, 여기는 뭐하러 오셨습니까’라며 무안을 주더라는 겁니다.”

▼ 『청남대갔다 망신 당했다』▼

현철씨는 그러나 김대통령 취임 이후 장인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고 장인을 둘러싼 여러가지 잡음이 계속 들려오자 부득이 장인을 김대통령 주변에서 격리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반론도 있다.

다시 재계인사의 설명.

“어쩌면 사위가 장인을 살렸는지도 모릅니다. 현철씨가 장인을 견제하지 않았으면 김사장은 2인자인 사위에 이어 김영삼정권의 3인자가 됐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고, 그렇게 됐다면 지금 어떻게 됐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한보사건으로 ‘김현철 청문회’가 열릴 당시 야당인 국민회의는 오정소(吳正昭)전안기부1차장, 이원종(李源宗)전청와대정무수석과 함께 김사장을 현철씨의 국정개입의혹규명에 필수적인 증인으로 꼽았다.

현철씨는 자신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음해라는 표현을 내세워 방어논리를 폈다.

지방선거 참패를 계기로 여권내에서 ‘사조직 배제론’이 등장하고 ‘김현철 해외유학 권유설’이 제기되자 현철씨는 이를 기득권세력의 음해라며 반격했다. 민정계는 물론이고 민주계 기득권층까지 겨냥한 반발이었다.

김대통령은 임기 후반 한보비리사건으로 ‘아비의 허물’을 자인(自認)하지 않을 수 없게 됐을 때까지 현철씨의 ‘음해론’에 더 귀를 기울였다. 비극의 뿌리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김창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