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공산군에 포로가 됐다가 45년만에 북한을 탈출해 생환한 양순용(梁珣容)씨는 국민에게 다시 한번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다. 바로 국민으로서 신성한 국방의무를 다하던 젊은 병사였다. 포로로 잡혀 그 악명높은 아오지탄광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목숨을 이었지만 자신이 한국의 노병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면역식(役式)에서의 그의 힘찬 경례가 그것을 말해준다.
북한에 아직도 양씨와 같은 많은 노병들이 붙잡혀 있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을 대표한 우리 정부가 그동안 국군포로의 생사확인과 생환, 전사자의 유해발굴과 송환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어왔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정부는 94년 조창호(趙昌浩)소위의 북한탈출 귀환을 계기로 국군실종자송환촉구대책위를 설치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다. 실종자의 명단은 그만두고라도 숫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지금까지 국방부가 정리한 국군행방불명자는 실종자 1만7천20명에 미확인자 2천3백72명으로 모두 1만9천3백92명이다. 그러나 북한은 전쟁 직후 국군포로수를 6만5천여명이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중 포로 교환 당시 돌아온 사람은 불과 8천3백33명이다. 최소한 5만명 이상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억류됐었다는 얘기가 된다.
북한은 지금도 억류된 국군포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양순용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생존자만도 50∼60명이라고 증언했다. 그에 따르면 국군포로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면서 북한당국으로부터 공민증을 발급받았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는 근거로 공민증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행불자중 10%만 생존해 있다고 해도 북한에 1천9백여명의 국군포로가 억류돼 있는 셈이다.
정부는 늦게나마 국군포로 생환문제를 이산가족 찾기에 포함시켜 추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남북회담에서 인도적 가족상봉문제가 상정된다면 국군포로 생환이 최우선 의제가 돼야 한다. 남북 직접협상이 안된다면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약을 적용해야 하며 유엔안보리에 올려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전쟁 당시 한국군은 공산군의 침략행위를 응징한다는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구성된 유엔군사령부에 소속되기도 했다.
지금 미국은 북한과의 한국전 전사자 유해송환에서 공식적으로 유엔군 이름을 쓰고 있다. 같은 유엔군이면서 미군의 유골송환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살아 있는 국군포로가 아직 억류돼 있는 현실을 정부는 뼈아프게 직시해야 한다. 정부는 국민의 의무를 다한 이들에게 이제라도 국가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