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법원이 27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길고 긴 줄다리기와 외교분쟁에 일단 한 매듭을 지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번 판결로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 그동안 일관되게 주장해 온 “65년 한일조약에 의해 모든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입장과 ‘도의적 책임’만을 되풀이해온 종래 주장을 수정해야 하게 됐다.
이번 판결은 “전후 피해자들에 대한 회복조치를 다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국회가 이를 위해 배상입법 조치를 구체화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명시, 일본정부와 국회의 의무소홀을 지적하고 태도변화를 촉구했다.
93년 일본정부가 공식으로 구일본군의 관여를 천명했음에도 이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국회가 입법행위를 게을리한 것은 기본적 인권에 대한 침해를 가져온 것으로 국가배상법상 위법이라는 것.
그러나 재판부는 위안부들과 달리 순전히 노동력 공급을 위해 끌려갔던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과는 성질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상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전법무상이 94년 “위안부는 당시 공창(公娼)이었다”고 발언한데 대한 인격과 명예훼손 여부에 대해서는 “원고를 지칭한 발언이 아니어서 명예를 침해한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91년 12월 위안부였던 김학순(金學順)씨 등이 도쿄(東京)지법에 국가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내면서 일본국가의 법적 책임문제가 본격화했다.
이 문제가 전후 처리와 관련해 일본을 압박하는 카드로 등장하자 92년 7월과 93년 8월 일본군의 관여사실을 인정하고 “국가배상에 대신할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태도는 애매했으며 그 뒤로도 “위안부는 공창” 또는 “위안부 자의(自意)에 의해 이뤄진 행위”라는 정당화 발언이 잇따랐다.
92년 12월 제기한 이순덕(李順德)씨 등의 소송에 대한 이번 첫 판결은 도쿄지법에 계류중인 6건의 위안부 관련소송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1인당 배상액을 30만엔으로 판결한 것은 ‘상징성’ 이상의 의미가 없어 피해자 등의 큰 반발이 예상된다.
〈도쿄〓윤상삼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