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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이인길/현장서 안통하는 정책

입력 | 1998-04-27 19:56:00


‘경영자 여러분, 현장을 돌아다니시오. 그래야 변화가 필요한 시대에 개혁을 현실에 맞게 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영개혁 바람을 일으킨 미국의 경영컨설턴트 톰 피터스의 이 말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책당국자들에게도 딱 들어맞는 권고다.

현실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내놓으려면 위정자들은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두루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지금은 정책과 현장간 이반(離反)이 너무 심하다. 기업인 은행원은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살기 바쁜 시장의 상인과 주부들조차도 관료사회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고 호되게 비판한다.

도대체 현장에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기자가 만난 현장 사람, 그리고 신문사를 찾아오거나 전화로 호소하는 사람들의 얘기중엔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 많다.

중소기업가 A씨의 경우. 종업원 20여명을 거느린 컴퓨터 부품제조 업체를 운영한지 올해로 5년째. 규모는 작아도 기술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에 납품을 하고 기술개발 투자도 하며 기업가의 꿈을 키워왔다.

그런데 IMF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납품물량이 어느날 갑자기 절반으로 줄었고 납품대로 6개월짜리 어음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깐, 대기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휴지조각이 되고말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지원자금을 신청하기 위해서였다. 관련서류를 구비해 요행히도 ‘지원적격’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 다음 단계는 기술신용보증기금. 여기서도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해 B등급을 받았다. 당연히 돈이 나올줄 알고 은행으로 달려갔는데 융자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은행지점에선 한마디로 ‘한심한 사람’이란 표정이었다.

내용을 제대로 훑어보기는커녕 서류를 탁 덮더니 신청자금 1억5천만원에 상당하는 담보와 보증인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보증인은 결국 구하지 못했고 시가 7천만원짜리 집은 담보가치가 3분의1도 안됐다. 은행을 10여차례 쫓아다니며 매달렸지만 결국은 허사, 사업을 포기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현장까지 오지도 않는 정책,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입니까.” A씨가 내뱉은 가시돋친 말이다.

또 다른 중소기업인 B씨. “지금 중소기업에 가장 절실한 것은 자금과 판로입니다. 돈도 타이밍을 놓치면 아무 소용없어요. 정부가 정말 중소기업을 도우려면 될 만한 곳엔 떼일 각오하고 덤비지 않으면 견딜 재간이 없어요.”

금융기관들도 할 말은 많다. 한 은행지점장의 하소연. “돈 떼이면 책임은 누가 집니까. 결국 지점장에게 모든 게 돌아옵니다. 비싼 금리주고 유치한 자금을 막 줄 수 없는 것은 상식이에요. 정부에서 아무리 은행장 불러 으름장 놔도 절대 일선에선 안통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중소기업정책요, 토씨 하나 안틀리고 옛날과 똑같아요. 창구에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고 말한다.

현실을 겉돌기는 ‘돈을 허공에 날리는’ 실업대책도 마찬가지고 ‘시장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부동산 정책도 그렇다.

요즘 기업인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는 일련의 검찰수사도 본질에서 왜 벗어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을 어겼으면 처벌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환란(換亂)수사에서 공직자의 개인비리가 전면에 등장하고 인허가 과정의 뇌물조사가 엉뚱한 쪽으로 비화하는 것은 명확한 책임규명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경제를 움직이는 주체는 사람이다. 현장이 경직되면 정책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책을 만들고 수사를 하더라도 경제의 미묘함이랄까 좀더 현장을 세심하게 배려할 수는 없을까.

이인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