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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며 생각하며]박성호/「예술원작 해석」무지와 오해

입력 | 1998-04-30 20:08:00


얼마전 신학철씨의 ‘모내기 그림’이 이적표현물이라는 법원판결이 있었다. 2000년대를 목전에 둔 지금도 ‘꿈보다 해몽’식의 이런 사법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문화예술계로서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독재정권시절 예술창작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오늘날까지 그 관성을 발휘한 탓이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런데 권력의 핍박 못지않게 예술창작의 자유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문화예술계 내부로부터의 오해와 무지다. 이것은 필자가 그동안 문화 학술 관련 저작권 상담을 하면서 나름대로 내리게 된 결론이다. 문화예술계 내부의 오해가 빚어낸 대표적 폐해는 바로 남의 원작(原作)을 가볍게 함부로 취급하는 풍토다. 이는 딱 꼬집어 어느 분야라고 할 것도 없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 고질 중의 하나다. 예컨대 ‘패스티시’기법이란 이름을 내걸고 남의 작품을 그 출처를 숨긴 채 모자이크하여 버젓이 펴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외국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베껴 놓고도 ‘아이디어 차용’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원작을 허락없이 개작(改作)해 놓고서 이것이 마치 자신들의 당연한 권한인 것처럼 떳떳해 하는 영상매체 종사자들도 있다.

몇년전 어느 대하소설을 영화로 제작할 때 그 결말이 원작과 크게 다르다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또 최근에는 어느 민영방송국이 인기 소설을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만들면서 줄거리를 크게 훼손했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원작자의 항의에 대해 영화감독과 담당 프로듀서는 “원작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이미 원작료를 지급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대꾸했다고 한다.

물론 소설가와 ‘원작 사용계약’을 체결하면서 원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작해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약정을 하였다면 그 범위 내에서 개작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개작 사용을 허락받은 적이 없다면 원작 사용료를 지급했다는 이유로 함부로 원작의 줄거리를 고치거나 뒤바꾸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이는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원작을 해석한다’는 것은 원작의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감독 마음대로 원작의 내용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악보를 제멋대로 고쳐서 지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번역가가 외국작품을 우리말로 옮길 때에도 해당 문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의역’을 할 수는 있지만 함부로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거나 결말을 뒤바꾸면 ‘오역’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외국의 경우와 달리 ‘문화기본법’이라 일컬어지는 저작권법을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자신들의 권리도 옳게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해서도 가볍게 생각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창작이란 ‘남의 것을 베끼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예술의 경쟁력이란 것도 결국은 ‘창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창작’이란 말을 자기 편리한 대로 오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