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정상들이 유러화(貨)체제를 내년 1월1일 출범시키기로 공식 선언함에 따라 세계 최대 단일 통화권 등장이 눈앞에 다가왔다. 유러는 내년 1월 금융시장과 국가간 거래에 첫 선을 보이고 2002년 1월부터는 유러 지폐와 주화가 본격 통용된다. 화폐통합을 선언한 11개 EU회원국의 개별 통화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사상 유례없는 ‘유러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이다.
인구 2억9천만명의 유럽단일통화권은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9.4%, 세계무역의 18.6%를 차지해 GDP 19.6%, 세계무역비중 16.6%인 미국과 맞먹는 경제권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럴 경우 지금 국제통화로 위력을 떨치고 있는 달러는 유러의 도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유러 탄생배경에는 유럽의 경제적 이익과 독립을 지키자는 정신외에도 달러화 일극체제에 대한 저항이 짙게 깔려 있다. 특히 최근 아시아의 금융위기에서 달러화의 위력을 생생히 목격한 유럽인들은 유러화의 등장에 더욱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유러가 또 하나의 기축통화가 되면 유러동맹의 발언권이 군사동맹 못지 않게 강화될 것이 분명하다. 유러와 달러의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IBRD)도 미국의 목소리만 따르기 어렵게 될 것이다. 지금 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과 유럽자본이 상당히 빠져나간 상태다. 앞으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러와 달러가 벌일 경쟁은 보지 않아도 능히 예상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발목을 묶고 있는 달러화 일변도 외채를 유러화로 전환해 외채 통화구성 비중을 다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단일통화권은 지역내 무역거래의 비중만 늘리는 배타적 경제권을 촉진할 가능성도 많다. 결국 세계시장은 권역별로 분점되어 더욱 치열한 경쟁상태로 들어가고 우리 기업의 유럽시장 뚫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무엇보다 직접투자 확대방안을 적극 검토해 현지생산의 길을 넓히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유럽 시장의 내수에 맞춰 현장에서 파고드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인류 최초의 경제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단일통화 유러의 장래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러 그 자체의 정치 경제적 응집력때문에 세계경제질서의 재편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전례없는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같은 국제환경의 변화가 IMF탈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유러와 달러의 틈바구니에 끼여 IMF 상처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다. 주도면밀한 정책 대응이 있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