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은 국가의 반동이라고 생각했지요. …오로지 자유민주주의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방아쇠 당겼어요. …한사람만 당하는 것이 낫지 그러지 않았다면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학생들이 피를 흘렸겠소. 탱크로 마산 부산 싹 쓸게 놔뒀어봐요. 그걸 막자고 내 실천에….”
잠깐, 잠깐…. 이게 무슨 착각인가. 백범 암살을 이야기하자는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를 증언하는 것인가. 신작 ‘천년의 수인(囚人)’에서 백범 암살범 안두희(이호재 분)가 목청 돋우는 주장.
고개만 갸우뚱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 그가 벌여놓은 굿판대로 박수치고 노래 따라부르고 주먹 흔들다가는 길 잃기 십상이다.
‘천년의 수인’은 미로게임이다. 출구는 한국현대사 찾기. 그러나 관객을 유인해 허방짚게 하는 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안두희와 빨치산출신의 비전향 장기수(전무송) 그리고 80년 5월 광주에서 여학생을 쏜 뒤 미쳐버린 계엄군 이병 장용구(이명호). 이들은 ‘공인된 역사’와는 엇갈리는 주장으로 관객을 혼돈에 빠뜨린다.
김일성의 지령으로 백범 암살을 준비했다는 비전향수는 자신과 안두희가 ‘남과 북으로 장소만 달랐을뿐 백범이 맺어준 일란성 쌍둥이’라고 반가워한다. 안두희는 김재규와 자신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 한몸 던진 의로운 사람’이라고 큰소리친다.
세대와 처지가 다른 세사람이 공통으로 짊어진 운명은 역사의 죄인으로 책임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
“나와. 총쏘라고한놈 나오라고. 나와서 뭐라고 좀 해줘. 나 아무 말 못하겠어…왜 나야. 내 친구들 포도 위로 저러고 바쁘게 걸어가는데왜나만죽어야돼.”(장용구)
“나 명령 받았어. 명령 받으면 부하는 복종하는 거야. 내가 그놈들 명령 거역했다가 이 졸개가, 일개 포병장교가 뼈다귀나 추릴 줄 알아?”(안두희)
책임은 ‘위’에 있다고 항변하지만 그러나 이 역사의 ‘깃털’들은 죄값을 피하지 않는다.
갖은 억지로 버티던 안두희는 “나는 대한민국의 모든 추악와 불행의 단초가 된 장본인이요. 나를 끌어다 매달아”하며 고개를 떨군다. 장용구는 자신을 구명하려는 작전이 진행중이라는 귀띔에 “작전으로 죽은 여학생이 살아납니까”라며 고개를 젓는다. 오태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진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다 피해가더라고?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된다고? 역사탓, 역사탓 하지만 당신도 그런 역사를 만들어온 한 사람이 아니냐고?
막이 내리고 컴컴해지는 그 순간 ‘연극 한편 때문에 내가 역사의 혼돈 속에 갇혔구나’ 너무 낭패스러워 하지 마시길….
동숭아트센터 제작으로 8일부터 6월14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화∼목 오후7시반 금 오후4시반, 7시반 토일 공휴일 오후3시, 6시. 02―3673―4466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