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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48]현철씨 「15대총선」공천 관여

입력 | 1998-05-06 07:33:00


“총재님, 그 분을 공천하면 한 석을 잃게 됩니다. 안되겠습니다.”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있던 96년 초.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신한국당 강삼재(姜三載)사무총장이 두말도 않고 자신의 ‘청탁’을 거절하자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김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 야당시절 동지 한 사람을 모 지역구에 공천하면 어떻겠느냐고 얘기를 꺼낸 것.

그러나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강총장이 “국회의원 의석을 하나 더 잃을지도 모른다”며 거절한 것이다.

당시 신한국당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여권내에서조차 ‘4·11총선’을 치러봤자 ‘한자릿수 의석’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팽배해 있던 상황이었다.

바로 전해 치러진 95년 6·27 지방선거 참패의 충격이 가라앉기는 커녕 오히려 무거운 패배의식으로 증폭돼 있었다.

김대통령이 지방선거 직후인 95년8월 43세의 강삼재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전격 기용하면서 총선에 관한 한 “전권(全權)을 갖고 임하라”고 한 것도 그런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 비관론 뒤엎고 139석 취득

강총장은 사무총장에 취임한 직후부터 말 그대로 ‘전권’을 갖고 총선준비, 다시 말해 공천작업에 몰두했다.

청와대쪽 파트너는 자타가 공인하는 ‘김현철(金賢哲)맨’인 이원종(李源宗)정무수석비서관.

강총장은 매일 아침 7시쯤 이수석과 전화통화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면서 총선 전략에 매달렸다.

‘신한국호(號)의 침몰’ 가능성까지 공공연히 거론되는 터에 ‘정실(情實)’이란 있을 수 없었다. 신한국당 부설 사회개발연구소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공천자를 압축해나갔다. 당시 목표는 과반수 의석인 1백50석.

강총장은 그러나 투표일 직전 김대통령에게 ‘1백40석’을 예상 의석수로 보고했다. 결과는 1백39석이었다.

선거전이 진행되고 있을 때 ‘신한국당이 한자릿수 의석 확보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극단적 비관론이 팽배했던 것에 비하면 총선결과는 한마디로 대승이었다. 하지만 잡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5대 공천을 지휘한 이수석과 강총장의 ‘투톱 시스템’ 뒤에서 현철씨가 사실상 모든 것을 지휘했다는 잡음이었다.

당시 공천 실무작업에 관여한 민주계 하위 당직자는 “강총장과 현철씨 사이에 연락간사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하위 당직자의 증언.

“강총장은 공천작업에 착수한 후에도 처음에는 ‘배수(倍數) 줄이기’를 진전시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배수 줄이기란 지역구당 최고 40∼50명씩이나 되는 공천 희망자들을 당선 가능성에 따라 압축하는 작업입니다. 강총장도 아마 현철씨가 신경쓰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당시 현철씨와 가까운 당직자가 강총장과 현철씨 사이를 오가며 심부름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이수석과 강총장 그리고 현철씨가 함께 만나 협의를 했는데 이미 강총장과 현철씨 사이에 기초조정이 있었기 때문에 큰 이견 없이 후보조정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강총장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했다.

공천작업의 실무는 이수석과 함께 했고 최종결정 작업은 김대통령과 직접 했으며 철저히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서 했기 때문에 ‘정실’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강총장과 가까운 수도권 초선의원이 강총장에게 직접 들었다는 공천과정.

“당시 강총장은 어떤 때는 일주일에 네댓번, 또 어떤 때는 하루에도 서너번씩 청와대에 불려갔다고 들었습니다. 강총장이 들어오면 김대통령은 자기가 적어놓은 ‘메모명단’을 꺼내 강총장의 의견을 구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대부분 강총장이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이 사람은 이래서 안됩니다’고 하면 수긍했다는 겁니다. 워낙 절박한 때였기 때문에 김대통령이나 강총장이나 당선 가능성 외에는 딴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강총장이 김대통령의 ‘유일한 민원’을 거절한 것도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초선의원의 계속되는 설명.

“항간에는 강총장과 이수석 그리고 현철씨가 마주앉아 공천 조정작업을 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실제로 강총장이 현철씨와 만난 것은 단 두차례뿐이었습니다. 그 때도 전반적인 선거전망에 관한 얘기들이 오갔을 뿐이지 공천자 명단을 놓고 협의하는 자리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실 강총장은 상도동 가신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철씨와 강총장은 그런 협의를 할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현철씨가 공천에 관여했다면 이수석을 통해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공천작업에 관여했다’는 것과 ‘공천을 좌우했다’는 것은 구별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현철씨의 막후 조종설이 끊이지 않은 것일까. 그럴 만한 정황이 없지 않다.

먼저 김대통령이 강총장에게 꺼냈다가 거절당했다는 ‘공천민원’. 김대통령이 강총장에게 부탁 겸 의견을 물은 사람은 과거 야당시절 동지였다.

그로부터 1년여 뒤에 열린 한보비리 청문회에서 현철씨는 김대통령의 ‘민원’이 사실은 현철씨의 ‘민원’이 아닌가 하는 심증을 갖게 해주는 대답을 했다.

97년 4월25일의 한보비리 청문회 당시 현철씨는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들의 거듭된 추궁에도 계속 공천개입을 부인했다.

현철씨는 그러나 이날 오후 늦게 신한국당 이사철(李思哲)의원이 일부러 공천이란 표현을 피해가며 “공천을 정말 받았는지는 나중 얘기니까 놔두고 누구를 추천한 적은 있느냐”고 묻자 “야당시절 함께 고생한 사람들을 추천했다”고 답변했다.

현철씨는 그리고 “추천은 아버님께만 했다”고 덧붙였다.

홍인길(洪仁吉) 청와대 총무수석과 한이헌(韓利憲)경제수석의 공천도 ‘김현철 개입설’을 불러일으킨 대목. 강총장 자신의 설명.

“대통령이 수석 중에 한 명은 선거에 내보내야겠다는 뜻을 비치셨다. 사실 수석들의 출마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대통령이 재차 의견을 말해보라고 해 순간 ‘홍수석을 출마시키는게 좋겠다’고 했더니 대통령도 아주 밝은 표정으로 ‘그게 좋겠지’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한수석이 출마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강총장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김대통령은 ‘수석 중 한 명’을 출마시키려 했던 것 같고, 그 한 명을 홍수석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수석까지 공천권을 따낸 것.

한수석이 공천을 받자 곧바로 ‘김현철 지원설’이 나돌았다.

게다가 현철씨의 국정개입을 폭로한 비뇨기과의사 박경식(朴慶植)씨는 한보비리 청문회에서 한수석을 현철씨가 공천에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여론조사는 가장 확실한 현철씨의 총선관여. 다시 한보비리 청문회.

김민석(金民錫)의원〓이원종 강삼재씨를 통해 간접적으로 공천에 개입하지 않았나.

현철씨〓그런 사실이 없다.

김민석의원〓여론조사 자료를 제공하면서 공천인사들을 도왔다는데….

현철씨〓여론조사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강총장의 말은 다르다. “현철씨가 여론조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아니냐. 당에서 취합한 현철씨의 여론조사 자료 중에는 현철씨쪽에서 온 자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료가 무슨 잣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부설 사회개발연구소에서 광범위한 여론조사를 했고 청와대 여론조사자료도 넘겨받았다. 기관의 도움도 받았다. 당에 넘어온 현철씨의 여론조사 자료를 갖고 ‘공천개입’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다.”

강총장은 현철씨가 넘겨줬다는 여론조사 자료의 의미를 격하했고 또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현철씨 자료’가 공천의 잣대가 될 수 없긴 했지만 적어도 공천작업에 ‘관여’한 사실은 확인된 셈이다.

▼ YS, 전국구순위 직접 정해

더구나 현철씨는 청문회장에서 “여론조사를 한 적이 없다”고 위증(僞證)했다.

증언들을 종합해 볼 때 현철씨가 김대통령에게 직접 추천하거나, 이원종수석을 통해, 그리고 여론조사를 통해 공천에 관여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현철씨의 공천관여는 당시 여권의 위기감, 한 석이라도 더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러기 위해서는 공천에 정실이 있을 수 없다는 여건 때문에 극히 일부 인사에 한정됐던 것 같다.

특히 전국구는 더욱 그랬다.

조웅규(曺雄奎) 오양순(吳陽順)의원은 당에서 작성한 전국구 후보명단에 없던 인사들이지만 김대통령은 전국구 1번인 이회창(李會昌)씨부터 21번인 박찬종(朴燦鍾)씨까지는 강총장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직접 번호를 매겼다는 것이다.

‘김현철 공천설’이 증폭된 것은 현철씨 자신의 과시욕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계의 3선급 중진인사의 증언.

“현철씨는 장차관 인사 때처럼 총선 공천자들을 만나 내정을 통보한 뒤 격려하는 식으로 과시욕을 보였습니다. 나중에 초선의원들 얘기를 들어보니 서울의 L, K의원, 수도권의 L, K의원 등 상당수 내정자들을 만나 마치 자기가 내정사실을 통보해 주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겁니다. 사실 그때는 당에서 이미 통보까지 마쳤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과시욕이었을까. 현철씨는 이른바 수도권의 ‘전략지역’에는 수천만원에서 억대의 총선지원금까지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김창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