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만4년.
두번째 시집이 나오기까지 그는 ‘공인된 건달’(작가)답지 않게 취직을 했다가 한달만에 때려치우기도 하고, 대구 교도소에 수감중인 대학후배의 석방운동을 위해 이리저리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모 언론사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정투쟁을 벌이기도 하면서, 그렇게 보냈다. 그렇게 시인의 시간을 죽였다. ‘때웠다’.
그 사이사이에 시(詩)가 그를 ‘부리기도 하고’, 또 그가 시를 ‘모시기도 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그는 그 사이에 사랑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실연(失戀)을 했던 모양이다.
오해는 하지말라. ‘그놈’이 아니다. ‘다른 놈’하고 말이다.(첫번째 시집의 화법을 빌리자면).아마도 ‘너를 만난 오월과 너와 헤어진 시월’ 그 사이에.
그러나 사랑은 순탄치 못했던 모양이다. ‘사랑의 시차(時差)’ 때문이었을까. 그 시차는 육감적인 거리감 같기도 하다. ‘피로를 모르는 젊은 태양에 눈멀어/제 몸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시작했던 사랑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나의 아침이 너의 밤을 용서 못하고/너의 밤이 나의 오후를 참지 못하고’ 끝났으니.
빈 자리에 선 시인은 묻는다. ‘그 찬란했던 시간의 알맹이들은 사라지고/껍데기뿐인 추억만 남았나’(달팽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잠시 훔쳐온 불꽃이었지만/그 온기를 쬐고 있는 동안만은/세상 시름, 두려움도 잊고 따뜻했다’고.
이제, 서른일곱의 시인 최영미.
서른셋의 나이에 시를 ‘저질러’ 문단의 매도와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그.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이은 두번째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왔다.
시인이 직접 디자인한 시집의 표지에는 끝내 놓지못하는, 간절한 마음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그는 아직도 망설인다. 서성인다. ‘이 비가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길…/이 비가, 제발, 그냥 지나가는 소나기였으면….’
하지만 실패한 사랑은 시에서나 현실에서나 ‘신파’의 위험을 안고 있다. 거의 숙명적으로.‘사랑은 가고/신파만 남았다//(마음이 식었다고?)/식은 마음에 매달려 그래도 혹시?/혹시의 혹시라도 남아 있을까/눈치없이 뜨거워진 내 마음은….’
그가 연애시만 쓴 것은 아니다. 또 연애시는 연애시로만 읽히지 않는다. 첫번째 시집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시는 어쩌지 못하는 ‘시대의 우울’에 깊이 가라앉아 있다.
‘우리 중 가장 뜨거웠던’, 그래서 지금 차가운 감방에 있는 이들에 대한 자책(自責)이 있고 현대자동차의 CF광고에 누렇게 뜬 레닌의 얼굴, 그 러시아의 ‘붉은 시월’에 대한 회한이 있다. ‘낡은 수법으로 새롭게 길들이려는 손’에 대한 반발(反撥)이 있고 ‘밖에서 잠그기 전에 안에서 갇혀버린 나’(변비의 끝)에 대한 자조가 있다.
그래선가. 시는 가끔씩 ‘습(濕)해진다’. ‘갈매기 울음만 비듬처럼 흐드득 듣는 해안’이거나 ‘뉘엿뉘엿 똥싸며 지나가는’ 석양이거나, ‘읽다 만 신문 한 귀퉁이에 말라붙은 코딱지’ 같은.
못다한 사랑에 대한 염원과 좌절.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강렬한 부인(否認). 무력감. 그리고 ‘뿔뿔이, 저마다, 깨진 돌덩이들’의 침묵….
그 화해할 수 없는 기구(祈求)와 절망은 예사롭지 않은 종교시를 낳는다. 해가 진뒤 붉은 네온의 십자가로 빠른 속도로 물드는 도시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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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의 풍경처럼 음산하게 시작되는 ‘아멘1’.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영혼’의 허기(虛氣)와 ‘싸늘하게 식은 지상의 양식’. 그 비애와 아득함이 저주처럼 내린다.적신다.
‘서로 경쟁하듯 솟은 십자가들…/승천하지 못하고 지상에 목을 걸친/가엷은 영혼의 안테나여/깜박깜박,유치찬란한 세기말의 밤을 장식하는/오, 부지런한 전기막대기들이여/천국이 너무 멀어, 꿈꾸다 지쳐 명멸하는가…’
〈이기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