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관문’ 항도 인천은 자민련 최기선(崔箕善)후보, 한나라당 안상수(安相洙)후보, 국민신당 김용모(金容模)후보가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자민련 최후보가 인지도가 떨어지는 다른 두 후보를 앞서고 있으나 이들의 추격전도 만만치 않다. 세 후보는 행정 및 경영능력, 참신성 등 각자의 장점을 내세워 유권자 파고들기에 온 힘을 쏟고 있다.
▼ 자민련 최기선후보 ▼
최후보는 철든 이후 세차례의 자기변신 과정을 거쳤다.
첫번째 변신은 서울대법대 재학 때 학생운동에 투신, ‘운동권’의 울타리에 몸담았던 시절. 두번째는 80년 1월1일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 운명적 첫 대면이 이뤄진 뒤 상도동 가신으로 정치권에 뛰어든 이후다.
그는 김전대통령 집권 직후인 93년3월 관선 인천시장으로 임명되면서 관료로 세번째 변신을 했다.
현재까지 관료로서의 변신은 비교적 성공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정치권에 몸담았던 상도동 직계들이 김전대통령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으나 그는 일찌감치 관료로 변신, 김전대통령의 그늘에서 상당부분 벗어났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그러나 김전대통령의 흔적은 아직도 그에게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김전대통령과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이같은 경력이 지금은 그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와 함께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 자민련에 입당한 점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부담을 던져주고 있다.
최후보는 45년 경기 김포에서 농사꾼 최중돈(崔重敦)씨의 2남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 중앙중을 거쳐 보성고 재학시절, 마음을 잡지 못하던 그에게 상경한 모친은 눈물로 호소했다.
그후 ‘최기선학생’은 하루 4시간씩 잠을 자며 공부에 매달린 끝에 서울대법대에 합격했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0년만에 졸업한 그는 국민회의 이협(李協)의원의 소개로 김전대통령의 비서였던 사별한 전부인 최영숙(崔英淑)씨를 만났고 그 인연은 김전대통령과의 만남으로까지 이어졌다. 인천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첨단정보산업단지인 ‘미디어밸리’개발과 송도신도시 건설, 지하철 착공 등 의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인천시에 1조6백억원의 부채를 남겼다. 이같은 공과(功過)에 대한 판단은 인천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내릴 대목이다.
▼ 한나라당 안상수후보 ▼
안후보는 전문경영인 출신의 정치신인. 경기고 선배인 박찬종(朴燦鍾)국민신당고문의 선거운동을 지원한 인연으로 96년 15대 총선때 인천 계양―강화갑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최기선시장의 갑작스러운 탈당에 이은 인천지역 의원들의 탈당으로 곤욕에 빠졌던 한나라당이 인물난으로 고심 끝에 뒤늦게 그를 선택했다.
해방 이듬해 충남 서산의 빈농집안에서 6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안후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혼자 인천으로 유학을 와 이모집에서 인천중을 다닌 것이 그와 인천과의 인연이다. 중고교에 이어 대학도 고학하다시피 다닌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75년 고교선배들과 함께 제세산업 창업멤버로 참여했다.
‘제세신화’로 불릴 정도로 급성장했던 제세산업이 망한 뒤 그는 한때 좌절을 겪다 증권사를 거쳐 동양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동양시멘트 부사장, 동양그룹 이동통신사업본부장,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전문경영인으로서 능력을 키워왔다. 국내 최초로 국제금융선물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국제금융업무에도 밝다.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실무능력과 비전을 갖춘 전문경영인으로 인간미와 의리가 넘친다”고 평한다. 그러나 행정경험이 전혀 없고 정치인으로서도 아직 검증받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또 뒤늦게 선거에 뛰어든데다 최시장과 의원들의 탈당 이후 당의 기반조직이 흔들리는 것도 부담이다.
제2의 고향인 인천을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어 심각한 경제위기를 타개하는데 일조하고 싶다는게 시장 출마의 변이다. 그는 “반평생을 경제일선에서 뛰면서 쌓은 경험과 능력을 나를 키워준 인천시민에게 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 국민신당 김용모후보 ▼
김후보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대학 1학년 때 부친을 여읜 김후보는 신문배달 외판원 과외 등을 전전하며 5명의 동생을 모두 교육시킬 정도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다.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 3선개헌반대투쟁위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그는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무역회사 등에 근무하다 80년 꿈이었던 무역회사를 창업,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에 성공한 그는 91년 대한상호신용금고 대표이사로 취임, 인천지역에서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95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남동구청장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김후보는 구청장 시절 자신의 판공비 내용을 공개하는 등 색다른 이미지를 심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국민회의에 입당, 인천시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한 그는 국민회의측이 최시장을 자민련 단일후보로 내세우자 국민회의를 탈당, 국민신당 후보로 나서게 됐다.
〈김차수·윤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