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격전지다. 그만큼 선거전도 치열하다. ‘환란(換亂)책임론’ ‘YS적자(嫡子)론’등을 둘러싼 국민회의 임창열(林昌烈)후보와 한나라당 손학규(孫鶴圭)후보측의 공방은 중앙당으로 불길이 번져 과열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 국민신당 이달순(李達淳)후보가 가세했다.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결과 국민회의 임후보가 10∼15% 포인트의 격차로 우위를 지키고 있지만 손후보의 추격전이 만만치 않다.
▼ 국민회의 임창열후보
재무부 이재국장 세계은행(IBRD)이사 과기처차관 해양수산부차관 재정경제원차관 통상산업부장관 부총리 겸 재경원장관…. 경제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임후보는 44년 서울에서 건축업을 했던 부친 임광식씨와 모친 김영순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6·25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임후보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전란을 피해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임후보는 부모에게 “경기중에 입학할테니 서울로 이사가자”고 조를 만큼 야심만만하고 당돌했다. 임후보는 결국 경기중 고를 거쳐 서울대 상대에 입학했다.
군복무를 마친 뒤 한국은행에 입사했던 임후보는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행정고시를 준비, 69년 행시 7회에 합격했다. 관료시절 그의 별명은 ‘불도저’. 한번 일이 맡겨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으며 조직장악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추진력이 강한 사람에게 흔히 붙는 ‘독선적’이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특히 자기 사람을 챙기는 보스기질로 인해 부하직원들의 평가가 엇갈렸다. 임후보는 지난해 11월 환란위기 극복의 중책을 맡고 경제부총리에 취임했다. 또 가시적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일까. 취임식 당일 기자회견에서 “IMF지원이 꼭 필요한지는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한마디 말 때문에 그는 한나라당측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이미 결정된 IMF행을 부인함으로써 국제신인도를 추락시켰다는 것이 그 요체다. 그에게는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의 책임부분은 환란의 근본적 원인이 아닌 사태수습 과정에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공방의 핵심은 그가 “취임당시 IMF행을 몰랐다”고 부인한 대목이고 이것이 그를 두고두고 괴롭히고 있다.
▼ 한나라당 손학규후보
‘압축성장’을 해 온 정치인 중 한사람. 93년 경기 광명을구 보궐선거로 금배지를 단 뒤 6년 사이에 집권당대변인 정책조정위원장 보건복지부장관에 이어 경선을 통해 경기지사후보가 될 정도로 요직을 두루 거쳤다. 대학시절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화운동, 대학교수 등 정계입문 전의 다양한 활동과 경력이 급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손후보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5남5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네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았다. 경기중고시절 밴드반과 연극반에서 활동할 정도로 공부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모범생이었던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2학년때 시위를 주도하다 무기정학을 당하면서 운동권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대학시절 고(故) 조영래(趙英來)변호사 김근태(金槿泰)의원 등과 함께 ‘운동권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졸업 후 탄광과 공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등 재야 민주화투쟁에 적극 참여하다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인하대교수를 거쳐 서강대교수로 있다가 문민정부 출범 후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개혁에 동참해 개혁을 뒷받침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초선으로 집권당 대변인을 맡았지만 논리적이고 설득력있는 논평을 발표, 호평을 받았다.
96년 보건복지부장관을 맡아 3년 이상 끌어온 한―약분쟁을 잠재우는 등 능력을 발휘했다. 복지부 직원 중에는 특히 “손장관시절에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손후보는 “의정경험과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경기도를 첨단산업 위주의 중심전략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입후보했다”고 말했다.
▼ 국민신당 이달순후보
이후보의 경력은 다채롭다. 정치학자 지역운동가 체육계원로 등으로 그가 60평생 쌓아온 직함은 1백여개에 달한다. 그만큼 매사에 정력적이고 열심이다. 이후보 스스로도 “일욕심이 너무 많은 것이 단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36년 서울에서 법조계에 몸담고 있던 부친 이석영씨와 한국최초의 여기자였던 최은희여사의 1남2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덕수초등학교 양정고 중앙대를 거치는 동안 줄곧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을 발휘했다. 77년 중앙대 정외과 조교수시절에는 유신정권에 항거, 반체제유인물을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이후보는 중앙대와 수원대에서 줄곧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 출마를 위해 국민회의의 문을 두드렸다가 여의치 않자 자민련에 입당한 뒤 다시 국민신당으로 당적을 바꾼 것이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차수·운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