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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희곡작가 김상수씨 「파리의 투안두옹」펴내

입력 | 1998-05-22 19:44:00


‘안개,안개는 세상의 벽이다. 죽음과 배회를 생각케 한다. 이 안개를 뚫고 걸어가야만 하는데 자꾸만 다리가 휘청거린다.햇살이 비치는 쪽,그곳은 어디인가.’

그는 안개의 나라 한국을 떠나 프랑스를 찾았다. 의식의 명료함, 예술의 진정성을 위해. 그러나 파리도 안개에 젖어 있었고 센강을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이야기했다. 한 베트남 소녀와 함께.

희곡 시나리오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상수씨(40)와 베트남출신의 10대 소녀 투안 두옹.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김씨의 사진 산문집 ‘파리의 투안 두옹’(동아일보사).

그들은 95년 처음 만났다. 당시 프랑스에서 열렸던 그의 설치미술전 ‘어디에 있는가’. 소녀는 그 전시회의 영상 비디오 모델이었다. 그리고 2년 뒤의 재회. 이 책은 그 소녀의 청순한 시선을 따라 프랑스 문화의 이모 저모를 들여다본다. 그리고나서 생각이 머무는 곳은 한국의 문화. 즉 프랑스 문화를 통한 한국의 문화 읽기인 셈이다. 이 10대 소녀는 그에게 방황과 고뇌로 얼룩진 청년기 기억의 편린을 되살아나게 한다. 숨막힐 정도로 부조리했던 70년대, 예술의 자유를 위해 ‘제도권’ 탈출을 결행했고 연극을 위해 한없이 쏘다니다 약관 스물의 나이에 희곡을 쓰고 무대에 연극을 올렸던 그 시절. 그리곤 한 여인에게 버림 받았고 그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뿌연 안개의 시절. 그래서 그는 소녀를 사랑해선 안된다고 자꾸만 다짐하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 프랑스 여행, 소녀와의 만남은 한국의 척박한 예술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이다. ‘역사의 얼굴’이란 전시회를 보며 일제시대 친일(親日)을 하고 어린 처녀를 정신대로 내몰았던 가짜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독재에 아부하며 권력을 누리고 치부(致富)했던 한국의 적잖은 원로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안개는 여전하다. 파리를 추억하고 소녀에게 편지를 쓰며 그는 이제 아시아의 역사를 생각한다. 소녀의 혈관 속 싱싱한 적혈구엔 파리의 공기 뿐만 아니라 수천년 베트남족의 내력까지 숨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메콩강에 혁명의 피가 흘러 넘칠 때 조국을 떠났던 할아버지의 아픔을, 아시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심원한 간극을 그녀는 느끼고 있을까. 책에 실린 소녀의 상쾌한 이미지 한컷 한컷이 그의 질문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광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