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연필 잡지 마.”
4월말 맏아들의 돌잔치를 치른 윤모씨부부(35·경기 성남시 분당구). 실꾸러미 지폐 활 연필 등이 널린 돌상고임에서 아이가 물건을 집으려는 순간 부부는 아이의 시선을 연필 아닌 다른 물건으로 돌리려 애썼다.
“애가 뭘 잡든 다 미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연필을 잡는 건 싫더라고요. 책상물림해 봤자 살기만 고달프기만하고….”
윤씨는 명문대 기계공학박사로 재벌기업 연구소에 근무 중인 엘리트.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로 접어든 뒤 우울하다. “고학력 엔지니어가 무슨 걱정이냐”는 주위의 생각과는 달리 직장에 끊임없이 감원설이 나도는 것.
“기를 쓰고 공부해서 도달한 자리가 아무 때나 목이 잘릴 수 있는 샐러리맨이라니…. 내 아이는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아요.”
얼마전 윤씨의 고교동창생 모임에선 증권사과장인 한 친구가 “돌잔치 때 딸이 다행히 연필을 안 잡고 활을 집었다. 박세리처럼 골프를 가르치든가 안되면 현정화처럼 탁구라도 시키겠다”고 해 좌중을 웃겼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자리잡은 30대 우등생 부모들. 그들의 자녀 교육관이 크게 바뀌고 있다.
지금의 30대는 5공 초기 과외가 금지됐던 몇년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부터 끊임없이 과외와 공부에 시달리며 살았던 세대. 그러나 부모가 된 이들 세대 사이에서는 “내 아이가 어른이 될 때는 공부 잘하는 것이 절대로 유일한 생존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공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의 확신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것은 각광받던 화이트칼라 샐러리맨들까지 우수수 감원한파에 밀려나고 있는 점.
세살 한살 남매를 둔 출판사 편집장 장은수씨(31·서울 노원구 상계동).S대 국문과 동창인 장씨부부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슨 직업을 갖든지 손기술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의사도 좋고 보석세공사도 좋습니다. 고위직이라도 ‘나가라’ ‘들어가라’ 소리 듣는 샐러리맨보다는 어디서든 자기 기술과 능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어요. 운동선수나 연예인도 좋고요.”
2년10개월된 아들을 키우는 주부 이선애씨(32·서울 강남구 수서동). S대 불문과 대학원까지 마친 이씨는 유아학습지 회사를 통해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학교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아들애가 ‘예쁜 것’에 관심이 많아요. 패션디자이너나 미용사가 되겠다고 한다면 일찌감치 제 길을 열어줄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해외유학도 필요할 것 같아 영어를 가르치는 거죠.”
젊은 부모들의 극성은 대안교육에 대한 관심의 고조로도 나타난다. 자유학교를 위한 모임 ‘물꼬’의 간사 옥영경씨의 얘기.
“경기가 악화된 후에도 계절학교나 방과후 프로그램에는 수강생이 넘쳐나요. 밥짓기와 바느질을 가르치거나 연극을 통해 삶에서 부닥치는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소하게 하는 것 등으로 학교공부와 직접 상관이 없는데도요.”
대안학교에 자녀들을 참가시키는 부모는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 경기 의왕시나 용인에서 서울 신촌까지 아이들을 차에 태워 오기도 한다.
교육관계자들은 젊은 부모들의 의식변화가 단기간에 ‘입시위주교육에 대한 전면부정’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명예와 부가 보장되는 ‘사’자 직업에 대한 선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 그러나 자녀들을 공부의 ‘좁은 문’으로만 밀어넣어 용꼬리가 되게 하기보다는 자질을 살려주어 한 분야에서라도 뱀의 머리가 되도록 하려는 의식 전환은 지금의 30대 부모들로 부터 확연해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미국 CNN방송의 테드 터너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도 결코 ‘학교 우등생’이 아니었다는 점에 착안해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를 새롭게 보는 눈, 다원화되는 21세기에 살기 위해 발빠른 상황적응력을 길러주려는 부모의 노력이 필요하다.
“21세기에는 양성성(兩性性)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남자아이들도 섬세해야 하고 여자아이도 진취적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자녀교육 참여가 꼭 필요합니다.”(교육학자 정유성교수)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