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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박두혁/「착한 사마리아인」이상과 현실

입력 | 1998-05-27 06:41:00


살인혐의로 기소됐으나 사실은 무죄인 피고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피고인이 변호사를 댈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경우에는 국선 변호인을 알선해 주는 것이 법률에보장돼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변호사가 피고가 주장하고 있는 진실, 즉 무죄를 입증하는 데에 미흡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면, 그 변호사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가. 만약 피고의 식구들 중 어떤 사람이 피고의 무죄를 입증해줄 만한 실력 있는 변호사를 알고 있어서 그에게 변론을 부탁했으나 수임료가 적다고 거부했을 경우, 그에게도 살인죄를 적용해야 하는가.

사람의 유일하고도 고귀한 생명은 그 누구도 처분하거나 유기할 수 없다. 가족들이 진료비 부담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 치료를 계속하지 않으면 사망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퇴원시킨 의사들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것은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새롭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의사도 위탁받은 생명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 한 구성원으로서의 권리, 법앞에 평등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의사가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소생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들도 퇴원을 시키지 못함으로써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병실에 자리가 없어서 구할 수 있는 다른 생명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거나 의사들이 중환자 진료를 기피함으로써 생명이 유기되는 일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의사는 변호사처럼 수임료를 둘러싸고 변론을 거부할 권리, 즉 환자의 진료를 거부할 권리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환자들이 진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는 경우 국선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제도도 없으니 말이다.

거리에 쓰러져 있는 이방인을 집에 데려다 치료해주고 옷과 돈을 준 ‘굿 사마리탄’이 아닌 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이상적(理想的) 논리만을 가지고 살기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면야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박두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