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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천재 이창호②]힘의 근원은 전주「고향집」

입력 | 1998-06-01 20:10:00


혹시 생가(生家)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바둑을 배운지 1년 만에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고속성장의 비밀을. 이런 생각으로 이창호의 고향 전주를 찾았다.

고속버스터미널 앞 관광안내소의 50대 여자 자원봉사자에게 이국수가 살던 집을 물었다. ‘바둑 잘 둔다는 총각’은 알지만 집은 모른단다. 길을 지나던 70대 노인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싶어 ‘중앙로 이(李)시계점’을 묻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 그집이사 잘 알제.팔달로 지나서 오른쪽에 객사(客舍)가 있는데 거기서….”

적어도 전주에서만은 ‘중앙로 이시계점’이 ‘천하바둑 이창호’보다 몇 수 위였다. 부자(父子)2대, 60년동안 한 곳에서 신용을 지켜온 이시계점이 전주교대 부속초등학교 3년, 아홉살 때 고향을 떠난 이창호보다 훨씬 유명한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이시계점은 이창호가 태어나 자라고 바둑을 만나 마침내 프로지망생으로 ‘서울 출사표’를 쓰기까지 머문 곳으로 귀금속상이 몰려있는 중앙로변의 작은 3층 건물이었다. 이국수의 부친 이재룡(李在龍·51)씨가 IMF영향으로 손님이 뜸해졌다면서 반가히 맞았다.

할아버지 이화춘(李花春·86년 69세로 작고)씨가 자전거에 태우고 동네 한바퀴만 돌아주면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던 아이. 세발 자전거 몰고 다니느라 하루해가 짧던 시절을 지나 여섯 살때 유치원에 입학하며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글을 배웠다고 한다. 이처럼 바둑을 배우기 이전의 이창호에 대해 그는 한마디로 ‘평범한 아이’라고 회고했다.

‘맘에 드는 것을 안 사주면 뒹굴며 떼를 써 끝내 주장을 관철했던 고집불통 아이. 분유회사가 주최한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조숙한 소년. 큐빅을 갖고 놀기 좋아했던 꼬마. IQ 139. 수학에 유달리 관심을 가졌던 학생’ 등등.

이런 이야기들은 이창호가 유명해지자 주위사람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린 이야기일 뿐, ‘오늘의 이창호’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단 한가지 확실한 진실은 이창호가 바둑을 만나면서 전혀 딴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어느날 우연히 이시계점 주인 이화춘씨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심심해하던 손자 이창호를 데리고 ‘설기원’을 찾아가면서 ‘이창호 신화’는 시작된다.

‘혼자서 기원 안을 돌아다니다 지겨워진 이창호는 할아버지가 끙끙대고 있던 바둑판을 보더니 어깨너머로 훈수를 해 승부를 바꿔놓았다. 그걸 계기로 기특한 손주는 바둑을 배우고 이내 할아버지를 이겼다. 할아버지를 괴롭히던 상대도 꺾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동네기원에 적수가 없어졌다. 바둑 입문 불과 1년만에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을 했다. 이화춘씨는 때마침 일본에서 프로바둑기사 조치훈(趙治勳)이 대활약을 하며 온나라를 떠들석하게 만들자 슬그머니 ‘내 손주라고 못할게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전영선(田永善)7단을 초빙해 일주일에 1∼2회 지도를 부탁했다. 기재를 인정받고 마침내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울에 올라온 이창호는 조훈현(曺薰鉉)을 만나 제자가 되고….’

운명의 ‘설기원’은 이시계점에서 좁은 골목길로 30미터 거리, 할아버지와 손주가 오순도순 걸어도 1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15년 세월이 지나 주인은 여러차례 바뀌었고 바둑을 두고 있던 나이든 분들도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곳에서 이창호는 할아버지의 배려로 아마추어 강자들인 이광필사범 이정옥사범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생가를 찾아 부친과 장시간 인터뷰를 해보아도 고속성장의 비결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어린 이창호가 바둑에 흥미를 느껴 새벽까지 홀로 기보를 들여다보며 공부했다고 하나 지금 맹활약중인 소년 프로기사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들과 다른 무엇, 어떤 환경이 소년 이창호를 세계최강으로 단숨에 올라서게 했을까.

인터뷰를 마치며 시계 진열매장 앞에선 이창호의 부친을 사진에 담을때였다. 카메라 앵글은 크고 작은벽시계로꽉들어찼다. 문득 가게안의1천여개 시계가 단진자(單振子)운동을하며 내는 초침소리가종소리처럼크게 느껴졌다.

바로 저 시계, 아니 시계와 초침소리로 가득찬 이 공간에 대한 친숙함이 아니었을까. 소년 이창호가 다른 프로기사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란 게. 제한시간으로 언제나 ‘초(秒)’에 쫓기는 프로기사들. 그러나 그 상대는 초읽는 소리에서 고향, 할아버지의 품처럼 따뜻한 향수를 느끼는 ‘돌부처’ 이창호. 그 대결의 결과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손재간꾼으로 시계수리일을 하던 조부의 섬세한 손길을 이어받은 머리좋은 꼬마가 시계점에서 ‘초(秒)’의 의미를 몸에 익혀 마침내 ‘천하국수’가 됐다는 생각은 지나친 추측일까.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