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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애니깽」]「망국恨」딛고 선 조선여인의 「기개」

입력 | 1998-06-02 07:00:00


이 여자들을 화나게 해선 안된다.

2일 막을 올린 서울예술단의 대형창작뮤지컬 ‘애니깽’의 세 여성주역 이정화(34) 고미경(33) 서은희(33).

국권상실의 시대인 1905년, 일본과 멕시코의 국제노예사냥꾼에 속아 지구 반대쪽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팔려갔던 1천33명의 조선인들.

농장감독의 채찍질 아래 당나귀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해갔던 이들 속에서도 세 여자들은 결코 쉽게 무릎 꿇지 않는다.

“전부 간도 쓸개도 삭아 버렸는가? 조선의 임금께 우리의 참상을 알리러 떠나라”며 머뭇거리는 남자들을 재촉하고 그들의 탈출을 돕다 장렬하게 죽어가는 여자들….

“당신이 가다가 죽으면 우리 아들을 키워서 뒤따라 보낼 것이구먼.”

조국으로 참상을 알리러 떠나는 네 명의 전령 중 한우(송용태 분) 처 삼례역을 맡은 고미경. 이를 악물고 이 대사를 힘주어 말할 때마다 기분이 예사롭지 않다. 고미경은 실제로 임신 4개월의 몸. 단원들은 “아들이든 딸이든 뱃속에서부터 애국자로 길러진 아이”라고 입을 모은다.

몸을 아껴야 하는 임산부임에도 고미경은 온 몸을 내던진다. 농장감독이 남편의 탈출을 막자 애니깽 자르는 칼로 그를 베고 처형되는 것.

삼례의 노래 ‘조선년의 기개’는 서릿발같다.

“…조선년이 너희보다 못할 줄 알았더냐/그 잘난 애니깽 가시에 찔려 죽을 것 같았더냐.”

전령으로 떠나는 남편 철구(이희정)의 뒷모습을 보며 “가야합니다/번개처럼 바람처럼”(‘가야합니다’중)이라고 기원한 뒤 앉은 자리에서 조용히 자결하는 순덕역의 서은희.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고난을 참아내는 조선여자의 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입니다. 남편이 떠난 땅에서 육신까지 능욕당할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거지요.”

주부로서 가계부를 꼼꼼이 정리하는 서은희는 ‘애니깽’의 상황과 요즘의 우리 현실이 분간이 안될 지경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대기업 샐러리맨인 남편 월급이 3분의 1정도 줄었습니다. 집도 줄여야겠다고 결심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정부가 무능하면 그 짐을 평범한 백성들이 다 져야하는구나 싶더군요.”

열여덟살 꽃다운 조선 처녀 명주역의 이정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몸이 되자”고 약속했던 연인 민우(박철호)와 맺어지기도 전에 농장주의 하룻밤 노리개가 돼야했던 비운의 여인.

그러나 노예감독을 총으로 쏘아 연인과 아버지의 탈출을 도운 뒤 처형되는 명주는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노래한다.

“두렵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당신의 마음과 사랑은 날 주고/나의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떠나요.”(‘내일의 태양’중)

가창력 빼어난 가수로 적잖은 팬을 갖고 있는 이정화는 ‘애니깽’에서도 드라마틱한 노래 ‘두눈을 떠봐요’ ‘내일의 태양’ 등으로 극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저도 처음엔 ‘애니깽’의 참상이 믿기질 않았어요. 관객들이 ‘애니깽’을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 우리 삶을 위한 교훈으로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애니깽’은 7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2일 오후7시반 3∼5일 오후4시 7시반 6,7일 오후3시 6시. 3,5일 낮공연 수익금은 전액 실업기금으로 기탁된다. 동아일보 후원. 02―523―0845

〈정은령기자〉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