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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스탠더드시대(17)]공공기관 정보공개

입력 | 1998-06-02 18:56:00

문화관광부 정보공개 접수처


지난해 2월 일본 도쿄(東京)고등법원의 판결 하나가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시민단체들이 아오시마 유키오(靑島幸男) 도쿄도지사를 상대로 낸 판공비 정보공개 거부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판공비 내역 일체를 공개하라’며 시민단체의 손을 들어준 것.

소송전 시민단체들은 도지사가 교부금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부 공무원들에게 엄청난 접대비를 쓴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공개조례를 이용, ‘음식을 수반하는 회의비(판공비) 자료’를 요구했다.

아오시마 지사는 자료를 순순히 내주지 않고 버텼다. 시민단체들은 소송으로 대응, ‘국가나 지자체 공무원이 참석한 회의는 프라이버시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결국 공무원들의 캐비닛 속에 감춰져 있던 판공비 내역은 낱낱이 공개됐다. 식사비용의 70%가 가짜 영수증임이란 사실도 드러났다.

파장은 컸다. 지자체 직원이 중앙정부 공무원을 ‘모시는’ 관관(官官)접대가 폐지됐다. 시민들의 분노가 이어졌다. 아오시마 지사는 물론 다른 지자체장들의 판공비도 60%가 깎였다. 밀실행정을 투명하게 바꾼 정보공개의 위력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다.

‘알 권리’는 매우 중요한 인권으로 세계 인권선언 19조에 나와있다. 알 권리를 보장해주는 정보공개제도는 행정패러다임을 엘리트 중심의 대의(代議)민주주의에서 참여민주주의로 바꿔놓은 획기적 제도.

수년동안 정보공개 입법화운동을 해온 숭실대 강경근(姜京根·법학과)교수는 “선진국의 정보공개 행정엔 네가지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들어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법이나 조례로 공개를 의무화하고 있다. 둘째, 정보의 이해관계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공개 요구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외국인도 포함된다. 셋째, 공개 대상을 행정기관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법부 입법부 그리고 모든 정부 투자기관으로 확대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 넷째,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청구하고 받아볼 수 있다.

이같은 세계 표준에 비추어볼 때 가장 발달된 정보 공개행정을 펴는 곳은 미국이다. 정보공개법의 대명사로 불리는 ‘정보자유법(FOIA)’이 바로 미국 것.

FOIA를 활용하면 못 빼낼 정보가 거의 없다. 한국에서는 비밀로 분류돼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정보도 FOIA를 통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 오히려 정보공개의 부작용을 우려할 정도.

85년 일본 나카소네 정권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록히드 사건.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가 FOIA를 활용해 청구한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정보에서 비롯됐다. 옛 소련의 우주 왕복선 개발계획은 소련이 FOIA를 이용해 얻어낸 미국의 왕복선 관련 정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한국도 겉보기엔 멀끔하다. 96년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을 제정, 1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아시아에선 최초로, 세계적으로는 13번째로 정보공개법을 가진 나라가 됐다. 이 법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그러나 정보를 얻기 위해 관공서를 한번이라도 찾아본 사람들은 분개한다. ‘정보의 곳간’ 열쇠를 틀어쥔 공무원들 앞에서 ‘법따로 행정따로’의 현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성공회대학 신학과 졸업반인 김규환(金圭煥·25)씨. ‘경찰청내에 호화 사우나 시설이 있다더라’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달 두차례나 경찰청을 방문,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담당 직원은 “학생이 그런걸 왜 물어보느냐”며 “공개 대상이 아니다”라면서 신청서도 받지 않았다.

참여연대 활동을 하는 신정아(申庭娥·여)씨. 3월 서울시에 버스 자동안내 시스템 설치에 관한 정보공개를 요구했다가 “와서 복사해가든지 말든지 하라”는 퉁명스런 대답만 들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이 최근 3개월간 행정기관 10곳을 대상으로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분석한 자료는 ‘정보공개법은 정보 비공개법’이라는 우스갯소리를 새삼 확인시켜준다.

93∼96년 상위 1백위 상속세 납부자의 상속세 징수현황과 체납액 감면현황’ 자료를 요구받은 국세청. 15일 이내에 공개여부를 통보하도록 돼있는 법을 어기고 경실련의 재촉을 받은 뒤에야 “그런 제목으로 만들어놓은 자료가 없다”는 식의 엉뚱한 답변만 보내왔다.

‘97년 각종 기금 및 정부 출연기관 감사결과 보고서’ 자료를 청구받은 감사원. 무려 45일이 지난 뒤에야 자료를 내줬다. 경실련은 감사원이 정보공개법의 ‘제삼자 의견청취’ 항목을 악용, 일부러 공개를 늦춰 정보의 신선도를 떨어뜨린 것으로 본다.

정보공개법 제정 실무를 맡았던 행정자치부 행정능률과 추한철(秋漢喆)서기관은 “공무원 의식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