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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57/軍개혁 실상]하나회 몰락의 서곡

입력 | 1998-06-03 19:34:00


문민정부 출범 열하루만인 93년 3월8일 육해공 3군 본부가 모여있는 계룡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던 군인들은 구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라디오뉴스에 깜짝 놀라 멈춰섰다.

“정부는 오늘 김진영(金振永·육사17기)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육사19기)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하고 후임에….”

군인들 사이에서는 “대단하군, 역시 대단해”라는 말이 터져나왔다. 한마디로 충격을 넘어 경악이었다.

5·16 쿠데타 이후 32년만에 되찾은 문민정부의 위력이 이날 만큼 군인들에게 실감나게 느껴진 적도 별로 없다.

문민정부의 ‘역(逆)쿠데타’ ‘군부에 대한 무혈혁명’으로도 평가된 이날 인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권영해(權寧海·육사15기)국방부장관이 이날 오후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힌 청와대와 국방부의 움직임.

“토요일(3월6일) 오후 늦게 경호실에서 ‘월요일 아침 7시30분까지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께서 취임 후 각 부처 장관들과 돌아가며 조찬을 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제 차례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죠.”

월요일인 8일 오전7시 권장관은 한남동 공관을 나섰다. ‘각하가 무엇을 물어보실까. 전력증강사업일까, 아니면 인사관련 문제일까. 장성급 정기 인사는 6월인데….’ 그는 만일에 대비해 군장성 인사기록카드 요약본을 지참했다.

“각하와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어요. 쑥국에 공기밥 감자튀김 햄 두쪽 등이 나왔습디다. 쑥국을 두어 숟갈 떴을까. 대통령께서 불쑥 말을 꺼내더군요.”

김대통령〓장차관 인사도 끝났으니 군인사도 시작해야겠지요.그런데 군인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습니까?

권장관〓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통수권 차원에서 인사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돼있습니다만….

김대통령〓아, 그래요. 그럼 됐구먼. 오늘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이 한마디는 하나회 척결로 통칭되는 숙군(肅軍)의 신호탄이었다. 김대통령은 장관이 놀라는 것을 애써 외면했다.

김대통령〓후임 육참총장은 서열대로 하는 것이 좋겠지요. 현총장 다음 서열이 누굽니까.

그는 식사를 중단한 권장관에게 “입맛이 없습니까. 그럼, 차나 한잔하지요”라며 옆의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인사카드를 펴놓고 본격적인 후임자 선정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군수뇌부는 이필섭(李弼燮·육사16기)합참의장 김진영육참총장 김동진(金東鎭·육사17기)한미연합사부사령관 조남풍(趙南豊·육사18기)1군사령관 김연각(金淵珏·육사17기)2군사령관 구창회(具昌會·육사18기)3군사령관 김재창(金在昌·육사18기)합참1차장으로 구성돼 있었다.

권장관〓(서열별로 설명하며) 제 생각에는 육사17기가 좋겠습니다.

김대통령〓아, 김동진장군을 총장에 임명하면 되겠군. 기무사령관은 김도윤(金度閏·육사22기)장군이 맡고.

그런 다음 ‘육군참모총장 김동진한미연합사부사령관, 기무사령관 김도윤기무사참모장’이라고 친필로 메모를 적어 권장관에게 주었다.

실무절차를 밟기 위해 권장관이 국방부로 돌아간 것은 오전9시경. 그는 즉시 이중형(李重衡)1차관보와 전영진(全寧鎭)인사국장을 장관실로 불러 인사명령 기안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권장관은 오전10시30분경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김대통령의 최종재가를 받아 국방부로 돌아갔다. 권장관이 김동진대장과 김도윤소장에게 전화로 임명사실을 통보한 것은 오전11시10분경이었다.

김동진장군은 당시 기분을 “탱크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이틀 뒤부터 팀스피리트 연습이 있어서 구내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던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를 새 총장으로 임명했다는 겁니다. 국방부에 들어가서도 실감을 못하는 나에게 권장관이 ‘자, 이제부터 육군은 당신이 맡아주는 거요’라며 김대통령의 메모지를 꺼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김대통령과 권장관이 청와대에서 후임 육참총장 인선을 놓고 한창 작업중이던 오전8시. 육군본부는 일상대로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계룡대 육본 연병장에서는 매월 첫째주 월요일에 실시하는 국기게양식이 시작됐다. 김진영총장은 예의 턱을 치켜든 특유의 자세로 5분여에 걸쳐 훈시를 했다.

“군도 새정부의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야 합니다….”

오전8시30분 육본 대회의실. 김총장은 각군 사령부와 육본 직할부대에서 각 부대 작전현황과 적정(敵情)을 보고받았다. 청와대에서는 이미 후임자가 결정됐을 무렵이었다.

오전9시 육본회의실. 육본은 아직 평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정된 일정에 따라 김총장 주재의 월요 일반참모회의가 열렸다. 주간행사 일정과 각 참모부의 작전 현황보고가 이어졌다.

김총장은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모른 채 다음과 같은 독려로 회의를 끝냈다.

“새정부가 출범하면서 새기분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는데 새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기회를 가집시다. 특히 경제적인 군을 만들 수 있도록 군예산 절감에 노력합시다. 개혁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일부 불만세력들이 예비군 훈련장 등에서 집단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 교육훈련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오전11시20분경 회의를 끝낸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총장에게 “총장님, 장관님 전화가 왔습니다”라는 비서실장 이상학(李相鶴·육사26기)준장의 음성이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임기 9개월을 남겨둔 시점에서의 해임통보였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비서실장을 불렀다.

“방금 장관에게서 전역명령을 통보받았다. 준비토록 하라.”

3월9일 오후 계룡대 연병장에서는 제29대 김진영총장의 이임 및 전역식과 제30대 김동진총장의 취임식이 거행됐다.

김동진총장과 함께 열병용 세단에 올랐던 김총장은 잠시 후 단상에 올라 전역사를 시작했다.

“19세의 철모르는 소년의 몸으로 육군의 일원이 된 뒤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36년의 긴 세월 동안 오직 군인을 천직으로 알았습니다. (중략) 육군은 신한국 건설에 적극 동참해 사회와 역사 발전의 초석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합니다.”

2분도 걸리지 않은 짤막한 전역사였다. 정치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문구도 전혀 없었다. 하나회의 적통(嫡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진영의 별 넷은 그렇게 떨어졌다.

다시 3월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군기무사령부 회의실. 전국 기무부대장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월례회의를 주재하던 서완수사령관은 마무리 훈시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대통령을 맞아 신한국 건설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기무사도 새로운 자세로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그의 훈시가 끝날 때쯤 옆자리의 김도윤참모장이 메모쪽지를 전달받고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서사령관이 “장관의 전화가 왔다”는 부관의 귀띔을 받고 나갔다. 김참모장은 회의실로 돌아오는 사령관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앞으로 새사령관을 도와 열심히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

3월9일 오전 김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모두 깜짝 놀랬재.”

그가 임기내내 행했던 ‘깜짝쇼 인사’의 상징처럼 된 이 말에 긴장된 회의장 분위기는 한순간에 깨졌다.

“각하, 저희들도 그렇지만 국민 모두 얼떨떨해 하고 있습니다.”

L수석의 화답에 김대통령은 물론 참석자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나갔다.

회의에 참석했던 수석비서관의 설명.

“김대통령의 진면목이 숨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큰 일을 저질러놓고 어른들이 당황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악동(惡童)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몰래 착한 일을 하고 칭찬을 기다리는 천진난만한 소년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표정이었죠.”

문민정부 초대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朴寬用)의원의 설명.

“일단 정부가 바뀌면서 국군통수권 확보차원에서 군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봐야겠죠.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군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에게 어드바이스해온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 인사도 그런 존재의 조언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김대통령은 당선 직후 군관계자들이 민자당사를 방문해 군개혁에 대해 이런저런 보고를 하고 돌아가면 ‘저 사람들은 내가 군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나중에 다 알게 돼’라고 혼자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었을까.

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