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듯 뽀얀 바탕, 병의 목부분을 한번 휘감은 뒤 S자로 몸통을 따라 내려간 갈색 줄무늬끈 문양 하나. 조선 백자의 명품 ‘철화(鐵畵)백자 줄무늬끈병’(15,16세기·국립중앙박물관)의 모습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백자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비밀은 줄무늬끈 문양의 기발한 ‘상징’에 있다. 이 문양은 ‘술을 마시다 술이 남거든 허리춤에 술병을 차고 가라’고 만들어 놓은 끈이다. 물론 실제로 허리에 꿰찰 수는 없지만 그 숨은 뜻이 놀랍다. 조선 도공의 재치와 낭만,익살과 여유 바로 그것이다.
이같은 재치와 낭만은 고려 청자에도 있다. ‘상감청자복사 모란무늬매병’(12세기·국립중앙박물관). 복사는 비단 보자기를 말한다. 청자 뚜껑 아래쪽엔 보자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 웬 보자기인가. 뚜껑을 여닫을 때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나지 말라는, 물이나 술을 흘려도 보자기가 빨아들여 귀한 청자에 흠이 가지 말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조선 후기 ‘서갑식 목침’(書匣式木枕·나무 베개·국립중앙박물관)도 뒤지지 않는다. 이 목침은 책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름 아닌 ‘책을 베고 잠을 자겠다’는 뜻. 잠 자는 순간에도 진리를 갈구하는 조선 선비들의 향학열을 상징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단원 김홍도(1745∼1806년경)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표작 ‘송하선인취생도’(松下仙人吹笙圖·고려대박물관). 이 그림엔 ‘길고 짧은 대나무통 봉황의 날개인가/달빛 가득한 마루에 생황 소리, 용의 울음보다 더 처절하구나’라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다.
그런데 그림에서 용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늘로 치솟은 노송(老松) 껍질이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궁금하던 차에 최근 김우림 고대박물관 학예연구사(역사고고학)가 중요한 대목을 찾아냈다. 그림 위쪽의 작은 가지 하나(그림 점선 부분)가 그것. 영락없는 용의 머리다. 용 머리를 그리면서 나뭇가지인양 슬쩍 넘어갔던 단원의 재치. 작품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시를 완벽하게 표현한 단원의 예술혼이자 낭만과 여유다.
익살과 낭만의 문화재 하나 더. 경북 칠곡의 통일신라 송림사지 전탑(塼塔·벽돌로 쌓은 탑)의 벽돌을 보자. 탑을 쌓은 벽돌 중 하나엔 고누판이 그려져 있다. 고누는 칸을 그려놓고 상대 말을 잡아먹거나 진로를 방해하는 놀이.
우선 떠오르는 의문점이 있다. 탑에 사용할 신성한 벽돌에 누가 감히 이런 장난을 했을까.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신라인의 익살과 낭만을 보여준다는 말인가.
강우방 국립경주박물관장(한국미술사)의 설명. “신라 벽돌공들이 몰래 고누판을 그려 넣고 벽돌을 구워냈을 때, 그 공사장은 왁자지껄 했을 것이다. 둘러 앉아 고누 두는 사람, 훈수하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명랑하게 울려 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감독의 호령 소리에 화들짝 놀라 감추기도 하고 못이기는 척 고누판 벽돌을 올려 탑을 쌓았을 것이다. 그 위로 다른 벽돌이 포개지니 문제가 있을리도 없고…. 저 신라인의 티없는 행위, 낭만과 재치, 여유가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