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직원 4만5천명중 1만8천7백명은 유휴인력. 이미 퇴직한 3천7백명을 제외하면 1만5천여명이 현재 정리대상. 이중 6천8백여명은 직무공유를 통해 고용유지. 8천2여백명은 정리해고 대상.’
정리해고를 놓고 노사간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회사측이 내놓은 인력정리 방안이다. 직무공유(잡 셰어링)란 근로자 개개인의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대신에 더 많은 근로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방식.
“현재도 매일 6천∼1만1천명은 일이 없어 집에서 쉬고 있다. 이들에게 통상임금의 70%를 지급하고 있다.”(이창우·李彰雨 이사)
“경영부실의 책임을 노동자에게만 전가하려는 것이다. 정리해고의 이유로 내세우는 올해 예상적자 1조5천억원의 산출근거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노조 관계자)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귀추는 대량해고의 경험이 없는 국내 대기업들에 중요한 선례가 될 전망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올해 종업원 3백명 이상 대기업에서 3만명이 넘는 인원이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게 되고 내년에는 대기업 인력의 20%에 해당하는 34만여명이 정리해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리해고가 가능한 노동시장, 그리고 이를 통한 고용의 유연성 제고’는 기업 및 노동시장 구조조정의 핵심쟁점 가운데 하나였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가 되면서 지난 2월 드디어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정리해고제 도입에 합의했다. 그러나 노동계의 저항은 아직도 만만치 않다.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해고는 불가피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상황에 아직 아마추어이며 감정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유길상·劉吉相 한국노동연구원 고용보험연구센터소장)
전문가들은 구조조정의 격랑을 맞게될 대기업들에 고용조정의 노하우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노사가 함께 수긍하고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 절실하다는 얘기.
이와 관련, 경총은 ‘합리적인 고용조정의 절차와 방법’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회원사들에 제시했다. 그 지침은 △기업의 해고회피 노력 △공정하고 합리적인 해고자 선정기준 마련 △근로자 대표와의 성실한 협의 △60일 사전통보 조항의 이행 △우선적 재고용(리콜) 노력 등을 골격으로 한다. 민주노총이나 경제연구기관 등의 견해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직무공유 재배치 무급휴직 등을 통해 최대한 해고회피 노력을 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정리해고를 택해야 한다. 직무공유라는 유럽식 방식과 정리해고라는 미국식 방식을 혼합한 중간형 모델이 적절하다.”(장성근·張成根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그러나 정리해고를 단행한 어떤 국내 기업도 이 지침을 충실하게 따른 사례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장연구원은 “비밀리에 진행돼 갑자기 통보되는 한국식 정리해고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부작용이 크다”며 “미국의 노동시장에 유연성이 높은 것은 자유로운 정리해고와 함께 기업측의 성실한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리해고가 고용조정의 전부라는 인식도 바꿔야 한다고 지적된다.
“고용조정은 반드시 경영효율을 높인다는 대원칙 아래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은 분위기에 편승해 원칙도 전략도 없이 ‘무조건 자르고 보자’는 식으로 고용조정을 하고 있다. 이는 경쟁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박광서·타워스페린 한국지사장)
한편 유럽식 직무공유제가 정리해고의 완충적 제도로 떠오르고 있지만 그 운용방식에 대해서는 아직 국내 노사간에 합의된 모델이 없다.
불가피한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고용안정에 대한 근로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고실업 시기엔 고용안정을 위해 임금삭감도 적극 수용하고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하다면 정리해고도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해고 가능성에 대비해 스스로 몸값을 높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도 안된다. 또 노사관계 불안이 경제회생의 한 열쇠인 외자유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대승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유길상소장)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