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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문민정부 59]軍개혁/하나회 142명 명단공개

입력 | 1998-06-10 19:44:00


93년 4월2일 오전 국방부와 합참의 장교들이 모여 사는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촌.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바쁜 출근길에 나섰던 일부 장교들은 우편함과 승용차 윈도브러시에 꽂혀 있는 이상한 유인물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육사 하나회 회원’이란 제목의 A4용지 크기의 유인물 10여장.

유인물에는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인 36기까지 각 기대표를 비롯해 기별로 7∼11명씩 모두 1백42명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73년 윤필용(尹必鏞)사건 이후 26기를 끝으로 명맥이 끊어진줄 알았던 하나회가 36기까지 뿌리를 내리고 살아 있었다는 사실에 군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인물을 발견한 장교들은 출근 직후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복사본이 국방부와 합참에 나돈 것은 물론이고 팩스를 통해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역대정권을 거치며 군권을 대물림해온 하나회 회원들이 처음 공개된 ‘하나회 명단살포사건’은 김영삼(金泳三)정권의 군부 대수술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하나회 핵심부에 대한 숙정으로 술렁이던 군심(軍心)은 이 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4월13일 이 사건은 마침내 신문 사회면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청와대가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등 사건이 확대되자 권영해(權寧海)국방부장관은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난상토론 끝에 강경 대처방침이 정해졌다.

김동진(金東鎭)육군참모총장은 법무감실에 수사지시를 내렸다. 사건의 성격상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이 맡아야 했지만 범죄수사단장인 채문기(蔡文基·육사24기)준장이 명단에 들어 있었고 헌병이 장군을 조사하는 것이 모양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법무감 이상도(李相道·육사23기)준장은 5명의 법무관으로 조사팀을 구성했다. 그러나 하나회 회원이 아닌 손태진(孫台鎭·육사22기)헌병감이 처음부터 별도조사에 나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4월17일 대전의 육군 교육사 지원처장 백승도(白承道·육사31기·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육군담당관)대령이 자신의 ‘단독행동’이라며 자수했다. 수사는 급진전됐다.

육군은 5월10일 명단에 오른 1백42명중 1백5명이 하나회원으로 확인됐다며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하나회원들은 이후 5년 동안 진급과 보직에서 철저히 불이익을 받았다.

하나회 출신 J예비역소장은 특히 명단살포 당일 백대령의 행적에 의문을 표시하며 “이 사건은 백대령의 단독행동이 아니거나 현장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백대령은 명단살포 전날인 1일 밤 교육사 헌병대장의 송별회식에 참석해 2일 오전1시까지 어울렸으며 새벽 5시에는 교육사 인근 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한 것이 목격됐습니다. 그가 직접 이 일을 했다면 4시간만에 대전∼서울구간을 왕복한 것은 물론 명단까지 뿌렸다는 말인데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백대령은 사건발생 5년만인 최근 처음으로 자신이 현장에 없었음을 시인함으로써 사건에 대해 새로운 의문을 던졌다.

“제가 현장에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명단을 살포한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백대령이 현장에 없었다면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하나회측은 “명단살포사건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하나회 회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음모”라며 “백대령은 그 조직의 행동대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나회 출신 C예비역소장의 설명.

“백대령은 노태우(盧泰愚)정권 당시 군부실세였던 9·9인맥(9공수여단장과 9사단장을 지낸 노씨를 중심으로 한 군인맥)의 핵심멤버였습니다. 이 조직은 정권교체 후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하나회를 제거하기로 계획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새정부 출범 직전에 친분이 있던 모언론사 기자에게 육사26기까지의 하나회 명단을 건네줘 이 언론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93년 1월호에 보도됐지만 예상외로 큰 파문이 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잡지 3월호 마감일을 앞두고 육사36기까지의 명단을 완전공개하기 위해 다시 기자와의 접촉을 시도했지만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당황한 백대령이 조직 상부와 상의한 뒤 명단을 뿌리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백대령은 이진삼(李鎭三·육사15기)장군이 21사단장 정보사령관 육참총장일 때 작전보좌관 비서실장 행정부관으로 계속 따라다닌 그의 심복이었습니다. 그런 위치에서 하나회 명단을 입수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백대령은 배후설을 극구 부인했다.

“배후가 있었다면 사건 후 전방 철책부대 연대장으로 나갔다가 다시 교육사에서 근무하는 등 보직이 안풀렸겠습니까. 인생과 명예를 누가 대신해줄 것도 아닌데 총대를 메라고 한다고 메겠습니까.”

백대령이 자수 당시 군수사기관에서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명단은 91년 7월 이진삼총장 부관으로 근무하면서 동빙고동 군인아파트에 살 때 누군가가 아파트 출입문과 바닥의 틈새에 ‘참모총장에게 보고해달라’는 메모와 함께 밀어넣어준 것을 보관하고 있었다. 하나회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라는 사명감으로 선배들에게 명단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종용하기도 했지만 아무도 보려고 하지 않았고 모월간지에 명단까지 실렸는데도 실체를 규명하려 들지 않아 명단을 뿌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언론보도로 사건이 공개되자 수사당국에 자수하지 않고 기자회견을 하기로 결심한 뒤 자수 전날인 16일 오후 5시10분경 교육사를 출발해 오후8시50분경 기자를 만나러 서울 모호텔 커피숍으로 갔다고 밝혔다.

그곳에서 전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던 도일규(都日圭·육사20기·전육참총장)수방사령관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가 “웬일이냐”고 물어 “제가 하나회 명단을 뿌렸는데 기자회견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밝혔다.

외국에 대사로 나갈 친구 축하모임 참석차 호텔에 왔다는 도사령관은 이 말을 듣고 “기자회견은 무슨 기자회견, 당장 자수해라. 마침 서울에 총장님도 올라와 계시니 찾아뵙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백대령은 밤 10시반경 총장공관으로 갔다.

김총장은 백대령이 전방사단 소대장 때 인접대대 대대장이었고 합참 대간첩본부에서도 보좌관과 부관 신분으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총장은 자초지종을 들은 뒤 ‘당장 자수하라’고 화를 냈다는 것.

이같은 백대령의 사건 전말에 대한 반박도 적지 않다. J예비역소장의 반박.

“백대령은 처음에 김총장을 만난 사실을 숨겼습니다. 3차 진술 때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수사관들이 추궁하자 비로소 자백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안면이 있더라도 대령이 참모총장을 그렇게 쉽게 만난다는 것이 군대상식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백대령이 자수하기 전날 김총장과 장시간 밀담을 나눈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사령관도 그렇죠. 수방사령관을 지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서울시내라고 하더라도 부대를 벗어날 경우 반드시 청와대 경호실장과 교감을 나눠야 한다는 겁니다. 친구 송별모임 때문에 부대를 떠날 수는 없다고 해요.”

하나회측은 백대령이 자수 당일 육군 수사기관이 아닌 대전 유성의 리베라호텔 사우나에서 쉬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헌병감실이 그를 선점해 범죄수사단 수사과장 K대령과 함께 있었고 그이후에도 집에서 출퇴근하며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백대령은 부분적으로 이를 시인했다.

“사우나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리베라호텔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채문기 범죄수사단장이 명단에 있었기 때문에 손태진헌병감은 별도 수사팀을 구성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자수하던 날 헌병감은 마침 서울 외박중이었습니다. 그는 수사과장에게 ‘별도 수사팀을 구성하겠으니 신변을 보호하고 외부접촉을 끊도록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수사과장 그리고 수사관 1명과 함께 호텔에 있었던 겁니다.”

문민정부의 숙군 회오리를 몰고왔던 하나회 명단 살포사건은 5년이 지난 지금 누가, 누구의 지시로 명단을 살포했는지, 명단을 뿌린 배경이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 투성이의 사건’이 돼버렸다.

육군 H장군은 “하나회의 폐해에 대해서는 많은 군인들이 공감했지만 명단살포와 같은 방법으로 여론을 호도해 하나회원이라고 해서 무조건 범죄자 취급한 것은 문제가 있었다”며 “지금이라도 옥석을 가려 억울한 피해자는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유성기자〉ys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