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에서 5천만원을 주고 24평 아파트를 전세낸 가정주부 백모씨(37). 더 넓은 자기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아득바득 허리띠를 졸라맸던 백씨는 며칠간 크게 고민했다. 급전이 필요해진 집주인이 “2천만원만 주면 아예 집 소유권을 넘기겠다”고 제의해온 것.
이사할 필요도 없는 데다 적금을 깨면 손쉽게 목돈을 마련할 수 있어 솔깃했지만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IMF시대엔 집을 사두는 게 손해’라는 아랫 동서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혼 10여년동안 집을 마련하지 못해 친구들 집들이만 가면 주눅이 들곤했던 김모씨(40·경기도 과천)도 IMF 한파가 괴롭지만은 않다. “친구들이 은행돈까지 빌려 사놓은 아파트가 몇달새 수천만원씩 폭락하는 걸 보며 ‘전세사는 낙(樂)’을 새삼스럽게 느낀다”고 그는 말한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IMF가 저소득층의 ‘내집’콤플렉스를 크게 해소했다고 평가한다.‘목돈이 될 것’이라며 막연하게 집을 사둔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보면서 ‘집〓주거시설’이란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는 설명.
신도시 부동산업소들은 요즘 ‘이도향촌(離都向村)’현상때문에 최악의 부동산경기를 넘기는 중이다. 일산시 주엽역 인근 부동산업체의 한 주인은 “서울 집을 팔고 생활비가 적게드는 신도시나 인근 전원지역에 터를 잡으려는 손님이 하루 2명꼴로 찾아온다”고 설명.
물론 IMF는 서민들에게 큰 주름살을 안겨줬다. 대출금리 폭등으로 어렵게 분양받은 아파트를 포기하거나 공장을 날려버린 중소업체 사장이 허다하다.
그렇지만 생활이 검소해지고 합리적인 소비문화가 정착될 수록 주택개념은 점차 생활공간을 중시하는 서구형으로 바뀐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 삼성경제연구소 엄선희(嚴宣熹)연구원은 “주택자금 대부분을 대출받고 평생 갚아나가는 미국형 주거문화가 자리잡을 여지가 많아졌다”며 “집없는 설움을 삭이는 세입자의 고충은 이제 TV드라마 속에나 남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