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씨가 이북출신이 아니었다면 소 5백마리를 몰고 북한을 찾아가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을까. 성공한 노년의 기업인이 태어난 곳, 자라난 땅, 그 곳의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남기고 가겠다는 집념을 불태우지 않았다면 이번 방북이 가능했을까.
고향, 그것도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과 정씨의 경우 ‘전공’인 기업의 싹을 그 고향에 심어놓고 싶다는 치열한 소망이 어우러졌기에 ‘소떼와의 북행’이 실현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의 방북이 성사된 데는 남북한 당국의 정치적 경제적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따지기에는 이번의 북한행은 너무 극적이다. 민족상잔의 피와 한이 서린 남북한의 정치적 교착점 판문점, 그 곳을 평화의 상징인 소를 몰고 건너가는 모습은 어찌보면 서사시(敍事詩)적이다.
또 한편 ‘밴조를 울리며’ 옛집을 찾아가는 늙은 목동의 흥취도 느껴진다. 이런 상념은 모두 ‘고향’이란 단어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도무지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던 정치적 제도적인 벽이 고향을 앞세운 인지상정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는 듯하다면 너무 감상적일까.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돈이 있어야만 고향을 찾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번엔 5백마리지만 결국 1천마리의 소를 주게 되고 옥수수 5만t을 내 방북티켓을 얻었으니 돈없는 실향민에겐 참으로 ‘그림의 떡’ 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남북으로 갈린 7백50만 이산가족 중 이런 통행세를 내며 고향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기자는 92년 남북총리회담 때 북한을 방문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만난 두 실향민의 얘기는 지금도 대못처럼 기자의 가슴에 박혀있다.
한 분은 “기차가 사리원역을 벗어나면 오른쪽으로 큰 두 봉우리의 산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산을 사진으로 찍어다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고 묻자 눈시울을 붉히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그곳에 묻혔을게다. 아니,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거기 선산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제상에 과일은 못올려도 사진이나마 올리면 불효를 용서받지 않겠는가”고 혼자말을 했다. 다른 분은 개성의 흙을 한줌 담아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침저녁 고향의 흙냄새를 맡으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두 분 모두 “돈만 있다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돈이 없어…”라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나 기자는 두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사진은 찍었지만 부탁한 실향민과 연락이 안닿았고 개성에선 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어 흙을 담지 못했다. 미안함과 몽매에도 고향을 못잊는 실향민의 한은 기자의 가슴에 사무치게 남았다.
오늘 정주영씨가 소떼를 몰고 북한에 들어가지만 돈없는 실향민들의 ‘피맺힌 부러움’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도적 견지의 이산가족 재회는 정치적 경제적 계산없이 무조건 이루어져야 한다. 소떼도 왕래하는 판문점인데 근 50년을 헤어져 산 피붙이들이 그 곳에서 못 만날 이유는 없다.
민병욱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