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판정작업에서 끝까지 은행의 막후에 남아 있기를 원했던 정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무대위로 뛰어올라 감독 겸 주연이 되고 말았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은행별로 부실판정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한 것은 5월7일. 은행들은 “시간이 촉박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이틀만인 9일 외부인사까지 포함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은 “이제 발동을 걸었으니 가만둬도 잘 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며칠 뒤인 5월10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죽일 기업은 죽이고 살릴 기업은 살리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금융권에 ‘살생부’ 리스트가 나돌고 금융경색마저 심해졌다. 전경련쪽에서도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분위기가 반전돼 “부실기업 판정은 ‘살생부’가 아니라 ‘소생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은행은 ‘그러면 그렇지’하며 5월말 14개 부실기업 명단을 금감위에 보고했다.
이위원장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일단 부실판정위원회에 발동을 걸었다는데 만족하고 2,3차로 계속 부실판정작업을 해나가기로 하자”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단호했다. “5대그룹도 포함시키시오.” ‘소생부’는 순식간에 ‘살생부’로 바뀌었다.
은행은 제쳐두었던 5대그룹 계열사의 자료를 모두 꺼내 재판정작업을 벌여 13일 새로운 부실기업 명단을 보고했다. 한차례 퇴짜를 맞은 이위원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5대그룹 계열사를 재검토해 퇴출대상에 추가해줄 것을 은행에 요구했다.
14일밤 추가선정작업이 진행됐다. 한번 끝나버린 은행간 이견조정이 쉬울리 없었다. 15일밤이 돼서야 5대그룹 계열사 10여개가 들어있는 명단이 작성됐다.
이위원장은 16일 아침 명단을 들고 청와대를 찾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획기적 개혁을 약속하고 돌아온 김대통령으로부터 날아온 것은 전보다 더한 질책뿐.
금감위는 자율적 조정이란 모양을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5대그룹 계열사는 그룹당 4개를 채울 것.’ 금감위는 구체적인 명단까지 제시했다. 은행들은 할당량을 채우느라 날밤을 샜다
“은행의 자율적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말하던 이위원장은 17일 5대그룹 계열사 20개를 포함, 55개 부실기업 명단을 들고 다시 청와대를 찾아 마침내 결재를 받는데 성공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