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 상륙한 심당길 일행 43명의 도공이 가마를 연 것은 다음해였다. 물통조차 나무로 짠 것을 사용했을 정도로 도자기에는 무지했던 이곳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경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이 평탄할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과의 문화적 격차 또한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훗날 이곳에서 발굴된 가마는 길이 15.6m 폭 1.2m 높이 1m 정도의 단실 오름가마였다. 지금도 이곳에서 공사를 하다가 발견되는 도편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옹기에 가깝다고 한다. 두께는 얇고 작풍(作風) 또한 항아리를 만드는 기법과 같은 방법을 쓰고 있는데다 고온으로 구워낸 게 분명한 것으로 두드리면 금속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고 하니… 그들이 와서 처음 구운 것은 ‘조선의 그릇’이었던 것이다.
첫 가마를 열었던 그 자리, 사쓰마야키 발상지는 지금 주택가로 되어 있다. 안개비 속으로 앙증맞은 목조주택들의 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이곳 교육위원회에서 세운 기념비 ‘사쓰마야키 발상지’가 서 있었다. 그 옆으로 빗속에 작업을 멈춘 포클레인 한대가 코끼리처럼 삽을 뻗고 4백년 전을 더듬고 있는 나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료사진으로만 보았을 때는 페인트 글씨로 ‘사쓰마야키 발상지’라고 쓰인 사각기둥이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우거진 잡초 속에 서 있더니 그래도 깨끗하게 정비를 해 놓았다. 고난 속에서도 이 땅에 문화의 씨앗 떨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을 이만큼이나마 기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나마 고맙고 마음이 가볍다.
심당길 일행이 마을 일본인들과의 분쟁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듯 이곳을 떠나 대나무숲이 우거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지금의 미야마(美山)로 숨어든 것은 5년 뒤인 1603년이었다. ‘촌민들의 늑대같은 습격을 피해 나에시로가와에 피난했다’고 ‘사쓰마야키총람’은 적고 있다. 산속을 헤매던 이들은 “여기가 고향땅과 많이 닮았다”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기록만으로도 43명의 신고(辛苦)에 가득찬 나날이 어떠했을까는 상상을 넘어선다.
이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을 끌고온 번주(藩主)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쓰마의 17대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1597년 2월 아들과 함께 두번째의 조선출정에 나선다. 정유재란이었다. 남원성 함락 등 전과를 올렸지만 다음해 노량해전에서 이충무공의 함대와 만나 패퇴를 거듭하던 그는 겨우 고니시(小西)군을 구하여 순천을 빠져나온다. 같은해 11월24일 부산항을 출발한 시마즈는 12월10일 하카다에 도착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8월에 죽었다.
사쓰마로 돌아갈 여유도 없이 그는 교토로 향한다. 일본 천하는 도쿠가와의 수중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599년, 사쓰마에서는 반기를 든 부하가 나타나 다음해까지 이어지는 긴 내란에 들어간다.
정세는 급변해 일본 천하가 양분되면서 시마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오사카로 거처를 옮기고 다음해 도쿠가와와의 최후의 접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빠져든다. 도쿠가와의 동군에 맞서 서군에 속했던 시마즈는 패퇴하고 도쿠가와가 천하를 움켜쥔다. 목숨이 위태롭게 된 시마즈는 바닷길로 간신히 가고시마에 돌아온다. 10월2일, 조선출병으로부터 3년만의 귀환이었다.
이후 시마즈는 도쿠가와와 사직을 건 지루하고 긴 협상에 들어간다. 조선에서 끌어들인 도공따위를 돌아볼 겨를조차 없이 몇 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에 의해 끌려온 도공들에게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러는 농사를 짓고 더러는 그릇을 굽는, 반농반도(半農半陶)의 생활로 근근이 목숨을 이어나간 세월이었다.
상륙한지 7년,비로소 그들은 정권의 안정을 되찾은 번주의 보호 아래 들어가게 된다.
한수산(작가·세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