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업은행 본점
《금융 공기업인 국책은행은 요즘의 금융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발짝 비켜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부실의 폭과 깊이는 민간 금융기관 못지않은데도…. 국책은행은 개발연대에 국가 경제정책의 지렛대 역할을 해왔다. 정부의 자원(돈)배분 관리가 상당부분 국책은행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고착화, 국책은행은 관치금융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부실의 대명사〓지난해말부터 최근까지 국책은행들은 부실채권 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났음에도 정부의 신용등급과 같다는 것 하나로 버텨왔다.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이 망하겠느냐. 그러니 돈 좀 꿔달라’는 식이다.
그러나 4월에 이변이 생겼다. 국가와 동등한 신인도를 인정받던 한국산업은행이 미국 신용평기기관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을 Ba1에서 Ba2로 강등당한 것.
국제사회가 산은을 이처럼 낮춰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산은은 지난해부터 발생한 대기업 협조융자 때 약방의 감초처럼 지원금융기관에 포함돼야 했다. 여기에 최근 동아건설의 지급보증요청, 정부의 새한종금 무상인수 지시 등으로 경영상황이나 신인도에 피멍이 들어버린 것.
산은이 안고 있는 고정(부도 및 법정관리 업체나 6개월 이상 연체중인 업체가 진 빚 중 담보를 처분했을 때 회수가 예상되는 금액에 해당하는 여신) 이하의 부실채권은 작년말 4조4천억원이었으나 올들어 6조원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총자산 75조원에 이같은 규모의 부실채권을 짊어지고 있는 산은을 시장원리의 잣대로 정상적 금융기관으로 볼 수 있을까. 정부는 12일 기업은행에 1조5천억원을 출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지분은 64.5%에서 98.0%로 늘어났다. 수년 전부터 밝혀온 민영화 방침이 무색하다.
왜 그랬을까. 점점 불어나는 부실채권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은 3개월 이상 연체된 여신이 총여신의 17%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억원을 대출하면 1천7백만원에 대한 이자가 제대로 걷히지 않는 셈.
관치금융에 휘둘려 생긴 부실 외에 방만한 경영이 낳은 비효율도 국책은행이 시장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산은은 2천5백억원을 출자해 설립한 산업증권을 연내에 폐쇄한다고 최근 밝혔다. 증권사를 세우지 않고 이 돈을 대출했더라면 원리금이 지금쯤 3천7백여억원이 돼 있었을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금융채 판매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며 산은이 100% 출자해 만든 자회사. 산은은 3월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하면서 부실덩어리인 산업증권을 살리려 했다. 후순위채까지 사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산업증권은 자본금의 일부까지 까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은 최근 명예퇴직을 통해 평균 21개월치의 월급을 주고 감원 했다. 그러나 ‘꼭 필요하다’던 산업증권의 직원들은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한 채 실업자 신세가 될 위기에 처했다.
국책은행들은 왜 손해를 무릅쓰고 자회사를 거느리려 할까. 자회사를 만들면 상무 이상 임원 자리만 5개 이상 생기는데다 필요하면 부회장과 회장직을 만들 수도 있다. 산업증권은 임원 7명 중 5명, 부장 이상 직원 중 55%가 산은 출신이었다.
이처럼 자회사를 ‘인력배출구’로 악용하는 관행은 민간 금융기관에까지 전염돼 비효율을 재생산했다.
▼인사난맥과 불투명한 미래〓산은총재와 수출입은행장 자리는 전통적으로 재정경제부(옛 경제기획원 재무부 재정경제원) 차관급 1급 2급 등의 인사 숨통을 터주는 자리로 활용돼왔다. 더구나 은행 등 제1금융권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을 타고 착지(着地)하는 경우가 적지않아 직원들을 당혹케 해왔다.
이러다보니 국책은행에는 장기비전이라는 게 없다. 산은만 해도 2년 전 외부 경영진단을 받고 구조조정계획을 세웠으나 올해 총재가 바뀌면서 그 계획을 백지화하고 최근 또다른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올해 국책은행장 인사에서 모처럼 전문성을 감안, 이건삼(李健三)뱅커스트러스트컴퍼니(BTC)동북아시아 총괄본부장을 기업은행장으로 내정하려 했다. 그러나 이씨는 관치금융에 찌든 은행을 마음껏 개혁할 여지가 적다고 판단,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불합리한 인사관리〓3·1빌딩으로 불리는 산은 본점에는 6대의 엘리베이터가 있다. 산은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마다 엘리베이터걸이 있는 걸 보고 놀란다. 산은측은 “69년에 설치한 구형 엘리베이터여서 홀짝수 운행이 불가능하고 일시에 6대가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버리는 경우도 있어 엘리베이터걸이 없으면 효율적인 운행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건물 입주 후 30년이 다 되도록 엘리베이터 운행 등의 면에서 비용절감 노력을 한번도 안한 것은 국책은행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은행인지 백화점인지 모르겠다.”(시중은행의 한 관계자)
이런 가운데 산은은 93∼96년 중 모두 2천8백60여억원의 급여성 경비를 지출, 정부지침을 6백14억원이나 초과했다.
수출입은행은 차장∼부장의 관리직급자가 1백17명이다. 행원 이하 직급자는 2백86명. 부차장급 1명에 행원 이하는 불과 2명 남짓으로 상위직급자가 상대적으로 비대한 가분수형이다. 인건비 부담이 늘고 업무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 은행 관계자는 “지점이 없다는 특성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며 “올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부장과 부부장급 27명을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금융관련 공기업 모두 49개사]
기획예산위원회가 집계한 금융 관련 공기업은 모두 49개.
비금융 공기업 1백8개에 대한 구조조정은 기획예산위가 담당하고 금융 공기업은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맡기로 했다. 이 가운데 덩치가 큰 것은 국책은행. 한국산업은행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3개가 있다.
산은은 산하에 산업증권 한국기술금융 산업리스 산업선물 한국기업평가 등 5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다. 이들 자회사가 만든 ‘손자회사’도 산업렌탈 등 3개가 있다.
또 정부 지분이 10.4%인 국민은행이 20개, 16.1%인 주택은행이 7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성업공사와 그 자회사인 대한부동산신탁도 금융관련 공기업이다.